“야아, 그런 줄 몰랐더니 꽤 많구나!”
하고 회원들은 저희들의 저금한 액수가 뜻밖에 많은데 놀랐다.
“그러길래 티끌 모아 태산이라지. 하지만 그걸 열 둘로 쪼개면 한 사람 앞에 삼십 팔 원 각수밖에 더 되나.”
동혁의 말을 듣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결코 많달 것이 없는 금액이다. 동혁은 회원들의 기색을 살펴보며,
“우리 그 동안 비럭질(거저 일을 해 주는 것)을 해 준 셈만 치고, 그걸로 몽땅 빚을 갚아 버리세. 나는 간신히 그 집에 빚을 안 졌지만, 내 몫하고 동화 몫이 남는데 건배 군은 취직을 한 모양이니까, 세 사람 몫은 거저 내놓겠네. 그럼 그걸루 많이 얻어 쓴 사람하구 적게 얻어 쓴 사람하구, 액수를 평균하게 만들 수가 있지 않은가?”
회원들은 얼른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좋고 그르다는 것은, 그네들의 표정이 없는 얼굴을 보아서는 모른다. 몇몇 해를 두고 쪼들리던 부채를 갚아준다니, 귀가 번쩍 뜨이나, 죽을 애를 써서 모은 것을 송두리째 내놓는다는 데는 여간 섭섭치가 않은 눈치다. 어린애는 배기 전에 포대기 장만부터 한다고, 그 돈을 눈 딱 감고 늘여서 돈백 원이나 바라보면, 토담집이라도 짓고 나와서, 남의 도지집을 면해 보려고 벼르고 있는 회원이 거지반이었던 것이다.
“섭섭할 줄은 아네. 하지만 눈앞에 뵈는 게 아니라구, 그 빚을 그대루 내버려 두면, 나중에 무슨 수로 갚아 보겠나? 칠용이 같은 사람은 돌아간 아버지 술값까지 짊어졌으니까, 억울한 줄은 모르는 게 아닐쎄만…억지루 하자는 게 아니니 싫으면 더 우기지 않겠네.”
하고 동혁은 슬그머니 얼러도 보았다. 그런 잇속에는 셈수가 빠른 석돌이는,
“선생님이 첫해부터 우리하구 똑같이 고생을 하신 것까지 내놓으신다는데, 두말 할 사람이 누구에요? 너무나 고맙고 염치없는 일입죠.”
하고 동혁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럼, 변리는 어떡하고 본전만 갚나요?”
한다. 그 말에 정득이와 칠용이도 매우 궁금하였다는 듯이,
“그러게 말씀에요. 배보다 배꼽이 커졌는데.”
하고 거의 동시에 질문을 한다.
“궁금할 줄도 알았네. 그러길래 무슨 수단을 쓰든지 내게다만 맡겨 달라고 하지 않았나?”
“안될걸요. 이마에 송곳을 꽂아두 진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인데 애당초 생각도 마시지요.”
“아, 노린 전 한 푼에 치를 떨고, 사촌간에도 꼭꼭 변리를 받는 사람이, 더군다나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놓지를 못해 하는 우리들의 변리를 탕감해 주겠어요? 어림없지, 어림없어.”
하고 머리들을 내젓는 것을 보고, 동혁은,
“이 사람, 경우에 따라선 병법(兵法)을 거꾸로 쓰는 수도 있다네…”
하고 자신 있는 듯이 간단히 대답하고 나서,
“헌데 한 가지 꼭 지켜야 할 게 있네. 내가 그 집엘 다녀오기 전엔 누구한테나 이 말을 입밖에도 내선 안되네. 그 사람이 미리 알면 다 틀릴 테니 명심들 하게. 그런데 온 전화통이 있어서…”
하고 슬쩍 석돌이를 흘겨본다. 정득이도 석돌이와 칠용이를 노려보며,
“천엽에 가 붙구 간에 가 붙구 하는 놈은 이젠 죽여버릴 테야 죽여 버려!”
하고 이를 뿌드득 갈며 벼른다.
아무리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를 해도 저녁 안으로 그 말이 새어서 기천의 귀에까지 들어갈 것을 동혁이가 모를 리는 없다. 건배를 작별하고 오다가, 기천이가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로 달려가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다. 기만이가 형이 술에 취해서 자는 사이에 빚을 놓아 먹으려고 금융조합에서 찾아온 돈을 오백 원이나 훔쳐 가지고 도망을 가서 형이 서울로 쫓아 올라갔다는 소문이 벌써 파다하게 났기 때문에 적어도 사오 일 내로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 동안 여러 날을 두고 동혁은 사방에 흩어진 돈을 모아들이느라고 자전거를 얻어 타고 분주히 돌아다녔다. 조합에 예금했던 것은 손쉽게 찾았지만 그 나머지는 받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요행으로 추수를 한 뒤라, 다른 때보다는 융통이 잘 되어서, 기천이가 내려오기 전날까지 그 액수가 거의 다 들어섰다.
기천은 조끼 안주머니에다가 똘똘 뭉쳐서 넣고 자던 돈을 아우에게 감쪽같이 도둑을 맞고 눈이 발칵 뒤집혀서 으례히 서울로 갔으려니 하고 뒤를 밟아 쫓아 올라갔다.
그러나 서울은 공진회 때와 박람회 때에 구경을 했을 뿐이라, 생소해서 무턱대고 찾아다닐 수도 없어, 경찰서에 수색원까지 제출했건만 친형제간에 돈을 훔친 것은 범죄가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찾게 되면 통지할 테니 내려가 있으라'는 주의를 받고 그 아까운 노자만 쓰고 내려왔다.
집에 와서는 콩튀듯 팥튀듯 하며, 만만한 집안 식구에게만 화풀이를 한다는 소문이 벌써 동혁의 귀에도 들어갔다. 동화에게 석돌이나 그 집에 가까이 다니는 사람을 감시하게 하는 한편으로 머슴애를 꾀송꾀송해서 물어 보면 단박에 염탐을 할 수가 있다.
'화가 꼭두까지 오른 판인데, 잘 들어먹을까' 하면서도 동혁은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저녁을 든든히 먹은 뒤에 큰마을로 기천이를 찾아갔다.
가는 길에도 '농촌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도, 너무 외곬으로 고지식하기만 하면, 교활한 놈의 꾀에 번번히 속아 떨어진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제 양심을 속이지 않는 정도로는 패(覇)를 써야 하겠다'하고 종래와는 수작하는 태도를 변해 보리라 하였다.
사랑마당에서 으흠, 으흠, 기침을 하니까,
“누구냐?”
하고 되바라진 소리를 지르며 내다보는 것은 바로 기천이다.
“그 동안 경행을 하셨더라지요?”
하고 동혁은 뻣뻣한 소리를 될 수 있는 대로 굽혀 보였다.
“아, 동혁인가? 그렇잖아도 좀 만나려고 했더니…”
기천은 마루에 나오며, 한 십 년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어서 이리 들어오게.”
하면서 동혁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제가 한 깐이 있고, 반대파의 회원들이 저의 집을 습격이나 할 듯이 행세가 위태위태한데, 그 질색할 놈의 동화는 저를 보면 죽이느니, 다리를 분질러 놓으니 하고 벼른다는 소문을 벌써 듣고 앉았었다. 속으로는 겁이 잔뜩 나서 동네 출입도 못하고 들어앉았는 판에 몇 번씩 불러도 오지를 않던 동혁이가 떡 들어서는 것을 보니, 가슴이 달칵 내려앉았다. 그렇건만 그 순간에 '옳지 마침 잘 왔다. 너만 구슬러 놓으면야 다른 놈들 쯤이야'하고 얕잡고는 친절을 다해서 동혁을 붙들어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