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혁은 팔짱을 끼고 서서 잠자코 건배의 독백을 들었다. 피덩어리같은 그 무엇이 치밀어오르는 듯한 것을 억지로 참고 섰으려니, 건배만큼이나 마음이 괴로왔다. 비록 술은 취했으나마 그 기다란 몸을 진흙 바닥에다 굴리면서 통곡을 하다시피 하는 것을 볼 때 달려들어 마주 얼싸안고 실컷 울고 싶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서 말대꾸도 못하였다. 아내가 듣다 못해서 마당으로 내려오며,
“이거 창피스레 왜 이러우, 어서 들어갑시다. 제발 방으루나 들어가요.”
하고 잡아끌어도 건배는 막무가내로 뻗딩긴다. 동혁은 그제야 건배의 겨드랑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여보게 건배! 어서 일어나게. 가을이 돼도 벼 한 섬도 못들여 놓고 지낸 자네 사정을 어찌 내가 모르겠나. 이런 경우에 자네를 힘껏 붙잡지를 못하는 게 무한히 슬플 뿐일세. 이번에 가면 아주 가겠나. 또다시 모일 날이 있겠지. 다른 말은 하기가 싫으이. 기왕 그렇게 된 일이니 자네의 맘이 다시는 변치 말고 있다가, 더 큰 일을 할 때 만날 것을 믿구 있겠네!”
건배는 동혁이가 뜻밖에 조금도 저의 탓을 하거나 몰아대지를 않는 것이 고마와서 동혁의 손을 힘껏 잡으며,
“이 손을 어떻게 놓나 응? 이 손을 어떻게 놔. 이 한곡리를 차마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정을 베는 칼은 없어! 없나? 인정을 베는 칼은 없어?”
하고 손을 벌리더니, 연기에 시꺼멓게 그을고 밑둥이 반이나 썩은 마룻기둥을 두 팔로 부둥켜안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 줌 흙도 움켜쥐고
놓치지 말아라
이 목숨이 끊지도록
북돋우며 나가세!
하고 애향가 끝 구절을 목청껏 부르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며 흑흑 느끼기만 한다. 그의 머리와 등어리에는 찬비가 어느덧 진눈깨비로 변해서 질금질금 쏟아져내린다.
건배가 떠나는 날 동혁은 오 리 밖까지 나가서 전송을 하였다. 몇 해 전 교원노릇을 할 때에 입던 것인지, 무릎이 나가게 된 쓰메에리 양복을 입고 흐느적흐느적 풀이 죽어서 걸어가는 뒷모양을 동혁은 눈물 없이는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밝기도 전에 도망꾼과 다름없이 떠나는 길이라, 작별의 인사나마 정다이 하러 나온 사람도 두엇밖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린것들을 이끌고 눈에 잠이 가득한 작은애를 들쳐업은 건배의 아내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걷지를 못하다가, 동리가 내려다보이는 마루터기 위까지 올라가서는 서리 찬 풀밭에 펄썩 주저앉았다. 한참이나 자기가 살던, 동리의 산천과 오막살이들을 넋을 잃고 내려보다가, 남편에게 끌려서 그 고개를 넘으면서도 돌아다보고 하는 것이 먼 광으로 보이더니, 그나마 아침 햇빛을 등지고 안계(眼界)에서 사라져 버렸다.
기천이가 건배의 빚을 갚아 주고 신분까지 보증을 하여서, 하루 일급을 받는 임시고원이 되어 간다는 것은 그의 아내의 입을 통해서 알았다. 군청에 사람이 째어서 몇 달 동안 서역을 시키려고 임시로 채용한 것이니까, 그나마 언제 떨어질는지 모르는 뜨내기 벌이다. 그러나 조만간 끊어질 줄 알면서도 건배는 그만한 밥줄이나마 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혁은 동리로 돌아오면서,
“오는 자를 막기도 어렵고, 가는 자를 억지로 붙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고 긴 한숨을 짓고는, 그 길로 회원의 집을 따로따로 호별 방문을 하였다. 그것은 강기천이와 겯고 틀려는 음모를 하려는 것도 아니요, 반대운동을 일으키려고 책동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자아, 우리 기왕에 그렇게 된 일을 가지구 왁자지껄 떠들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누가 잘하구 잘못한 것도 따지지 말구 어느 시기까지는 우리가 할 일만 눈 딱 감고 하세.”
하고는 미리 불평을 막았다. 그는 기천에게 매수된 회원에게도 똑같은 태도로 임하였다. 석돌이와 칠용이 같은 회원은 동혁을 보더니, 질겁을 해서 쥐구멍으로라도 들어가려고 드는 것을,
“허어 이 사람, 내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할 짓들을 누가 하랬나?”
하고 너그러이 웃어 보이면서, 전일과 조금도 다름없이 은근하게,
“난 이런 생각을 하는데, 자네들 의향은 어떨는지?”
하고 조끼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놓으며,
“자,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우리 어떻게 빚버텀 갚을 도리를 차려 보세. 빚진 죄인이라구 남의 앞에 머리를 들고 살려면 우선 빚버텀 벗어넘겨야 하지 않겠나?”
“그야 이를 말씀이에요.”
어느 회원은 동혁이가 은행의 담이나 뚫어 가지고 온 것처럼 그 말에는 귀가 번쩍 뜨이는 눈치다.
“그렇게만 되면야, 우리두 다리를 뻗구 자겠지만…”
하면서도 무슨 방법으로 갚자는지를 몰라서 동혁의 턱을 쳐다본다.
“그런데 우리 회원들이 강 도사집에 농채(農債)니 상채(喪債)로 또는 혼채(婚債)로 진 빚을 쳐보니까, 본전만 거의 사백 원이나 되데그려. 그러니 또박또박 오푼 변을 물어가면서 기한에 못 갖다 바치면, 그 변리까지 추켜매서 그 원리금에 대한 오푼 변리를 또 물고 있지 않은가? 허구 보니 자네들의 빚이 벌써 얻어 쓴 돈의 삼 배도 더 늘었네 그려. 주먹구구로 따져 봐두 천 사백 원 턱이나 되니, 자네들이 무슨 뾰족한 수가 생겨서, 그 엄청난 빚을 갚아 보겠나!”
“어이구, 일천 사백 원!”
갑산이가 새삼스러이 놀라며 혀를 빼문다.
“그게 또 자꾸만 새끼를 칠 테니 어떻게 되겠나? 몸서리가 쳐지도록 무섭지가 않은가?”
“그러니, 세상 별별 짓을 다해도 갚을 도리가 있어야죠. 그저 텃도지도 못 물고 있는 사람이 반이나 되는데요.”
“그러길래 말일세. 그 빚을 어떻게 갚든지 내게다만 죄다 맡겨 주겠나? 그것부터 말하게.”
“그야 두말할 게 있에요. 빚만 갚게 해 주신다면 맡기고 여부가 없읍죠.”
하는 것이 이구동성이다.
“그럼, 나 하는 대루 꼭 해야 하네. 나중에 두말 못하느니.”
하고 동혁은 두 번 세 번 뒤를 다졌다.
동혁은 회원이 빚을 얻어 쓴 날짜와 금액을 적은 장부를 꺼내더니
“그러면, 우리 이럭허세. 우리가 삼 년 동안 공동답을 짓고, 닭과 돼지를 쳐서 모은 것하고, 이용조합과 이발조합에서 저금한 걸 따져 보니까, 회관을 지은 것은 말고도 사백 육십 여 원이나 되네.”
하고 일 전 일리도 틀림없이 꾸며 놓은 회의 여러 가지 장부와 대조를 시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