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공? 저놈들이 필시 나한테 강압 수단을 쓸랴나 보."
"글쎄올시다. 아모튼 메칠 안 남은 발악이니 충돌은 마시고 잘 모면만 하십시오."
"불러도 안 들어가면 어떠리까?."
"그건 안됩니다. 지금 핑계가 없어서 구속을 못하는데 관명 거역이라고 유치나 시켜 놓고 머리를 깎으면 그건 기미년 때처럼 꼼짝 못허구 당허십니다."
"옳소. 현 공 말이 옳소."
하고 김 직원은 그 이튿날 또 읍으로 갔는데 사흘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고 나흘째 되던 날이 바로 '팔월 십오 일'인 것이었다.
그러나 현은 라디오는커녕 신문도 이 주일이나 늦은 이곳에서라 이 역사적 '팔월 십오 일'을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지나 버리었고, 그 이튿날 아침에야 서울 친구의 다만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로 비로소 제 육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여행증명도 얻을 겸 눈치를 보려 주재소에 갔으되, 순사도 부장도 아모런 이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가네무라 순사에게 넌지시 김 직원이 어찌 되어 나오지 못하느냐 물었더니,
"그런 고집불통 영감은 한참 그런 데서 땀 좀 내야죠."
한다.
"그럼 구금이 되셨단 말이오?"
"뭐 잘은 모릅니다. 괜히 소문 내지 마슈."
하고 말을 끊는데, 모두가 변한 것이 조금도 없다.
'급히 상경하라, 무슨 때문인가?'
현은 궁금한 채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날은 버스가 정각 전에 일찍 나왔다. 이 차에도 김 직원을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현은 떠나고 말았다.
버스 속엔 아는 사람도 하나 없다. 대부분이 국민복들인데 한 사람도 그럴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한 사십 리 나와 저쪽에서 들어오는 버스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쪽 운전수가 팔을 내밀어 저쪽 차를 가서 세운다.
"어떻게 된 거야?."
"무에 어떻게 돼?."
"철원은 신문이 왔겠지?."
"어제 방송대루지 뭐."
"잡음 때문에 자세들 못 들었어. 그런데 무조건 정전이라지?."
두 운전수의 문답이 이에 이를 때, 누구보다도 현은 좁은 틈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리들이오?."
"전쟁이 끝났답니다."
"뭐요? 전쟁이?."
"인젠 끝이 났어요."
"끝! 어떻게요?."
"글쎄 그걸 잘 몰라 묻습니다."
하는데 저쪽 운전대에서
"결국 일본이 지구 만 거죠. 철원 가면 신문을 보십니다."
하고 차를 달려 버린다. 이쪽 차도 갑자기 굴르는 바람에 현은 털썩 주저앉았다.
"옳구나! 올 것이 왔구나! 그 지리하던 것이 ."
현은 코허리가 찌르르해 눈을 섬벅거리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일본 사람은 아닌 얼굴들인데 하나같이 무심들하다.
"여러분은 운전수들의 대활 못 들었습니까?."
서로 두리번거릴 뿐, 한 사람도 응하지 않는다.
"일본이 지고 말었다면 우리 조선이 어떻게 될 걸 짐작을 허시겠지요."
그제야 그것도 조선옷 입은 영감 한 분이
"어떻게든 되는 거야 어듸 가겠소? 어떤 세상이라고 똑똑히 모르는 걸 입을 놀리겠소?."
한다. 아까는 다소 흥미를 가지고 지껄이던 운전수까지
"그렇지요. 정말인지 물어보기만도 무시무시헌 걸요."
하고, 그 피곤한 주름살, 그 움푹 들어간 눈으로 운전하는 표정뿐이다.
현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조선이 독립된다는 감격보다도 이 불행한 동포들의 얼빠진 꼴이 우선 울고 싶게 슬펐다.
"이게 나 혼자 꿈이나 아닌가?"
현은 철원에 와서야 꿈 아닌 <경성일보>를 보았고 찾을 만한 사람들을 만나 굳은 악수와 소리나는 울음을 울었다. 하늘은 맑아 박꽃 같은 구름송이, 땅에는 무럭무럭 자라는 곡식들, 우거진 녹음들, 어느 것이고 우러러 절하고 소리지르고 날뛰고 싶었다.
해방 전후 [解放前後] (이태준) - 8. 소리지르고 날뛰고 싶다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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