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되었든 현이 서울 다녀온 보람은 없지 않았다. 깔끔하여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으려던 가네무라 순사가 시계를 고쳐다 준 이후부터는 제법 상냥해졌고, 우편국장, 순사부장, 면장들이, 문인대회에서 전보를 세 번씩이나 쳐서 불러간 현을 그전보다는 약간 평가를 높이 하는 듯, 저희 편에서도 자진해 인사를 보내게끔 되어 이제는 그들이 보는데도 낚싯대를 어엿이 들고 지나다니게끔 되었다.

낚시질은, 현이 사용하는 도구나 방법이 동양 것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역시 동양적인 소견법(消遣法)의 하나 같았다. 곤드레가 그린 듯이 소식 없기를 오랄 때에는 그대로 강 속에 마음을 둔 채 조을고도 싶었고, 때로는 거친 목소리나마 한 가락 노래도 흥얼거리고 싶은 것인데 이런 때는 신시(新詩)보다는 시조나 한시(漢詩)를 읊는 것이 제격이었다.

小縣依山脚 官樓似鐘懸
觀書啼鳥裏 聽訴落花前
俸簿稱貧吏 身閑號散仙
新 釣魚社 月半在江邊

현이 이곳에 와서 무엇이고 군소리 내고 싶은 때 즐겨 읊조리는 한시다.

한 번은 김 직원과 글씨 이야기를 하다가 고비(古碑) 이야기가 나오고 나중에는 심심하니 동구(洞口)에 늘어선 현감비(縣監碑)들이나 구경 가자고 나섰다. 거기서 현은 가장 첫머리에 대산강진(對山姜瑨)의 비를 그제야 처음 보았고 이조말(李朝末) 사가시(四家詩)의 계승자(繼承者)라고 하는 시인 대산이 한때 이곳 현감으로 왔던 사적을 반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길로 김 직원 댁으로 가서 두 권으로 된 이 대산집(對山集)을 빌리어다 보니 중년작은 거의가 이 산읍에 와서 지은 것이며 현이 가끔 올라가는 만경산(萬景山)이며 낚시질 오는 용구소(龍九沼)며 여조유신(麗朝遺臣) 허모(許某)가 와 은둔해 있던 곳이라는 두문동(杜門洞)이며 진작 이 시인 현감의 시제(詩題)에 오리지 않은 구석이 별로 없다.

그는 일찍부터 출재산수향(出宰山水鄕) 독서송계림(讀書松桂林)의 한퇴지(韓退之)의 유풍을 사모하여 이런 산수향에 수령되어 왔음을 매우 만족해 한 듯하다. 새 우짖는 소리 속에 책을 읽고 꽃 홑는 나무 앞에서 백성의 시비를 가리는 것이라든지 녹은 적으나 몸 한가한 것만 신선이어서 새로 낚싯군들에 끼어 한 달이면 반은 강변에서 지내는 것을 스스로 호강스러워 예찬한 노래다.

벼슬살이가 이러할진댄 도연명(陶淵明)인들 굳이 팽택령(彭澤令)을 버렸을 리 없을 것이다. 몸이야 관직에 매었더라도 음풍영월(吟風泳月)만 할 수 있으면 문학이었고 굳이 관대를 끌르고 전원(田園)에 돌아갔으되 역시 음풀영월만이 문학이긴 마찬가지였다.

'觀書啼鳥裏 聽訴落花前!'

'이런 운치의 정치를 못 가져봄은 현대 정치인의 불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이런 운치 정치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을 것인가? 음풍영월만으로 소견 못하는 것이 현대 문인의 불행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음풍영월이 문학일 수 있는 세 상이 다시 올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런 세상이 올 필요나 있으며 또 그런 것이 현대 정치가나 예술가의 과연 흠모하는 생활이며 명예일 수 있을 것인가?'

현은 무시로 대산의 시를 입버릇처럼 읊조리면서도 그것은 한낱 왕조시대(王朝時代)의 고완품(古玩品)을 애무하는 것 같은 취미요 그것이 곧 오늘 자기 문학생활에 관련성을 가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었다.

'그렇다고 내 자신이 걸어온 문학의 길은 어떠하였는가? 봉건시대의 소견문학과 얼마만한 차이를 가졌는가?'

현은 이것을 붓을 멈추고 자기를 전망할 수 있는 피란처에 와서야 또는 강대산 같은 전세대(前世代) 시인의 작품을 읽고야 비로소 반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의 아직까지의 작품세계는 대개 신변적인 것이 많았다.

신변적인 것에 즐기어 한계를 둔 것은 아니나 계급보다 민족의 비애에 더 솔직했던 그는 계급에 편향했던 좌익엔 차라리 반감이었고 그렇다고 일제(日帝)의 조선민족정책에 정면 충돌로 나서기에는 현만이 아니라 조선문학의 진용 전체가 너무나 미약했고 너무나 국제적으로 고립해 있었다. 가끔 품속에 서린 현실자로서의 고민이 불끈거리지 않았음은 아니나 가혹한 검열제도 밑에서는 오직 인종(忍從)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 체관(諦觀)의 세계로밖에는 열릴 길이 없었던 것이다.

'자, 인젠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일본이 망할 것은 정한 이치다. 미리 준비를 하자! 만일 일본 이 망하지 않는다면 조선은 문학이니 문화니가 문제가 아니다. 조선말은 그예 우리 민족에게서 떠나고 말 것이니 그때는 말만이 아니라 민족 자체가 성격적으로 완전히 파산되고마는 최후인 것이다. 이런 끔찍한 일본 군국주의의 음모를 역사는 과연 일본에게 허락할 것인가?'

현은 안해에게나 김 직원에게는 멀어야 이제부터 일 년이란 것을 누누히 역설하면서도 정작 저 혼자 따져 생각할 때는 너무나 정보(情報)에 어두워 있으므로 막연하고 불안하였다. 그러나 파시즘의 국가들이 이기기나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이내 사라졌다. 뭇솔리니의 실각, 제이 전선의 전개, 싸이판의 함락, 일본신문이 전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의 대세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현은 붓을 들 수는 없었다. 자기가 쓰기는커녕 남의 것을 읽는 것조차 마음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 강가에 앉아 觀書啼鳥裏 聽訴落花前은 읊조릴망정, 태서 대가들의 역작, 명편은 도무지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아, 다시 읽은 '전쟁과 평화'를 일 년이 걸리어도 하권은 그에 못다 읽고 말았다.

집엔 들어서기만 하면 쌀 걱정, 나무 걱정, 방바닥 뚫어진 것, 부엌 불편한 것, 신발 없는 것, 옷감 없는 것, 약 없는 것, 나중엔 삼 년은 견딜 줄 계산한 집 잡힌 돈이 일년이 못 다 되어 바닥이 났다.

징용도 아직 보장이 되지 못하였는데 남자 육십 세까지의 국민의용대 법령이 나왔다. 하루는 주재소에서 불렀다. 여기는 시달서도 없이 소사가 와서 일르는 것이니 불안하고 불쾌하긴 마찬가지다. 다만 그 불안을 서울서처럼 궁금한 채 내일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달려가 즉시 결과를 알 수 있는 것만 다행이었다.

주재소에는 들어설 수 없게 문간에까지 촌사람들로 가득하였다. 현은 자기를 부른 일과 무슨 관계가 있나 해서 가만히 눈치부터 살피었다. 농사 진 밀보리는 종자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걷어 들여오고 이름만 농가라고 배급은 주지 않으니 무얼 먹고 살라느냐, 밤낮 증산이니, 무슨 공출이니 하지만 먹어야 농사도 짓고 먹어야 머루덤불도, 관솔도, 참나무 껍질도 해다 바치지 않느냐, 면에다 양식배급을 주도록 말해 달라고 진정하러들 온 것이었다. 실―실 웃기만 하고 앉았던 부장이 현을 보더니 갑자기 얼굴에 위험을 갖추며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낚시질 안 갔소?"

"안 갔습니다."

"당신을 징병단에도, 방공감시에도 뽑지 않은 것은 나라를 위해서 글을 쓰라고 그냥 둔 것인데 자꾸 낚시질만 다니니까 소문이 나쁘게 나는 것이오. 내가 어제 본서에 들어갔더니, 거긴 이런 한가한 사람이 있어 버스에서 보면 늘 낚시질하니 그게 누구냐고 단단히 말을 합디다. 인젠 우리 일본 제국이 완전히 이길 때까지 낚시질은 그만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