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합시다."

"침착할 이유가 어디 있소?"

양편이 다 같이 예리한 시선의 충돌이었다. 뿐만 아니라 옆에 섰던 젊은 작가들은 하나같이 현에게 모멸의 시선을 던지며 적기를 못 뿌리는 대신, 발까지 구르며 박수와 환호로 좌익 데모를 응원하였다. 데모가 지나간 후, 현의 주위에는 한 사람도 가까이 오지 않었다. 현은 회관을 나설 때 몹시 외로왔다. 이들과 헤어지더라도 이들 수효만 못지 않은, 문학단체건, 문화단체건 만들 수 있다는 자신도 솟았다.

"그러나 그러나."

현은 밤새도록 궁리했다. 그 이튿날은 회관에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 맞는 친구끼리만? 그런 구심적(求心的)인 행동이 이 거대한 새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새 조선의 자유와 독립은 대중의 자유와 독립이라야 한다. 그들이 대중운동에 그처럼 열성인 것을 나는 몰이해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추진시키는 데 티끌만치라도 이바지하려는 것이 내 양심이다.

다만 적기만 뿌리는 것이 이 순간 조선의 대중운동이 아니며 적기편에 선 것만이 대중의 전부가 아니란 그것을 나는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런 내 심정을 몰라준다면, 이걸 단순히 반동으로밖에 해석할 줄 몰라준다면 어떻게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인가?'

다음날도 현은 회관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방에서 혼자 어정거리고 있을 때다. 그날 창밖에 데모를 향해 적기를 내어 뿌리던 친구가 찾아왔다.

"현형, 그저껜 불쾌했지요?."

"불쾌했소."

"현 형, 내 솔직한 고백이요. 적색 데모란 우리가 얼마나 두고 몽매간에 그리던 환상이리까? 그걸 현실로 볼 때, 나는 이성을 잃고 광분했던 거요. 부끄럽소. 내 열 번 경솔이었소이다. 그날 현형이 아니었드면 우리 경솔은 휠씬 범위가 커졌을 거요. 우리에겐 열 사람의 우리와 똑 같은 사람보다 한 사람의 현 형이 절대로 필요한 거요."

그는 확실히 말끝을 떨었다. 둘이는 묵묵히 담배 한 대씩을 피우고 묵묵히 일어나 다시 회관으로 나왔다.

그 적색 데모가 있은 후로 민중은, 학생이거나, 시민이거나, 지식층이거나 확실히 좌우 양파로 갈리는 것 같았다. 저녁이면 현을 또 조용한 자리에 이끄는 친구들이 있었다. 현은 문협에서 탈퇴하기를 결단하라는 간곡한 충고를 재삼 받았으나, 문협의 성격이 결코 그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한쪽에 편향한 것이 아니란 것을 극구 변명하였는데 그 이튿날 회관으로 나오니, 어제 이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자네가 말한 건 자네 거짓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본 대로 자네는 저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걸세. 그 회관에 오늘 아침 새로 내걸은 대서특서한 드림을 보면 알 걸세."

하고 이쪽 말은 듣지도 않고 불쾌히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현은 옆엣 사람들에게 묻지도 않았다. 쭈루루 밑엣 층으로 내려가 행길에서 사층인 회관의 전면을 쳐다보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현은 미처 보지 못하고 들어왔는데 옥상에서부터 이 이층까지는 어떤 표어나 구호보다 그야말로 대서특서한 것이었다.

안전지대에 그득한 사람들, 화신 앞에 들끓는 군중들, 모두 목을 제끼고 쳐다보는 것이다. 모두가 의아하고 불안한 표정들이다. 현은 회관 사층을 십 분이나 걸려 올라왔다. 현은 다시 한번 배신(背信)을 당하는 심각한 우울이었다. 회관에는 문협의 의장도 서기장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문학건설본부'의 서기 정만이 뒤를 따라 들어서기에 현은 그의 손을 이끌고 옥상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