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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장(呼出狀)이란 것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시달서(示達書)라 이름을 바꾸었다고는 하나, 무슨 이름의 쪽지이든, 그 긴치 않은 심부름이란 듯이 파출소 순사가 거만하게 던지고 간, 본서(本署)에의 출두 명령은 한결같이 불쾌한 것이었다.
현(玄) 자신보다도 먼저 얼굴빛이 달라지는 안해에게는 의롓건으로 심상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정도 이상 불안스러워 오라는 것이 내일 아침이지만 이 길로 가 진작 때이고 싶은 것이, 그래서 이 날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밥맛이 없고, 설치는 밤잠에 꿈자리조차 뒤숭숭한 것이 소심한 편인 현으로는 <호출장> 때나 <시달서> 때나 마찬가지곤 했다.
현은 무슨 사상가도 주의자도, 무슨 전과자(前科者)도 아니었다. 시골청년들이 어떤 사건으로 잡히어서 가택수색을 당할 때 그의 저서(著書)가 한두 가지 나온다든지, 편지 왕래한 것이 한두 장 불거진다든지, 서울 가서 누구를 만나보았느냐는 심문에 현의 이름이 끌려든다든지 해서, 청년들에게 제법 무슨 사상지도나 하고 있지 않나 하는 혐의로 가끔 오너라 하기 시작한 것이 인젠 저들의 수첩에 준요시찰인(準要視察人) 정도로는 오른 모양인데 구금(拘禁)을 할 정도라면 당장 데려갈 것이지 호출장이니 시달서니가 아닐 것은 짐작하면서도 번번히 불안스러웠고 더욱 이번에는 은근히 마음 쓰이는 것이 없지도 않았다.
일반지원병제도(一般志願兵制度)와 학생특별지원병제도 때문에 뜻 아닌 죽음이기보다, 뜻아닌 살인, 살인이라도 내 민족에게 유일한 희망을 주고 있는 중국이나 영미나 소련의 우군(友軍)을 죽여야 하는, 그리고 내 몸이 죽되 원수 일본을 위하는 죽음이 되어야 하는, 이 모순된 번민으로 행여나 무슨 해결을 얻을까 해서 더듬고 더듬다가는 한낱 소설가인 현을 찾아와 준 청년도 한둘이 아니었다.
현은 하루 이틀 동안에 극도의 신경쇠약이 된 청년도 보았고 다녀간 지 한 종일 뒤에 자살하는 유서를 보내온 청년도 있었다. 이런 심각한 민족의 번민을 현은 제 몸만이 학병 자신이 아니라 해서 혼자 뒷날을 사려해 가며 같은 불행한 형제로서의 울분을 절제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전혀 초면들이라 저 사람이 내 속을 떠보려는 밀정이나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그런 의심부터가 용서될 수 없다는 자책으로 현은 아무리 낯선 청년에게라도 일러주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굽히거나 남긴 적이 없는 흥분이곤 했다.
그들을 보내고 고요한 서재에서 아직도 상기된 얼굴은 그에 무슨 일을 저질르고 만 불안이었고 이왕 불안일 바엔 이왕 저질르는 바엔 이 한 걸음 절박해오는 민족의 최후에 있어 좀더 보람있는 저질름을 하고 싶은 충동도 없지 않았으나 그 자신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너무나 오랜 동안 굳어 버린 성격의 껍데기는 여간 힘으로는 제 자신이 깨트리고 솟아날 수가 없었다. 그의 최극작인 어느 단편 끝에서,
'한 사조(思潮)의 및에 잠겨 사는 것도 한 물 및에 사는 넋일 것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일러는 오나 모든 게 따로 대세의 운행이 있을 뿐 처음부터 자갈을 날라 메꾸듯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한 구절을 되뇌이면서 자기를 헐가로 규정해 버리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당신은 메칠 안 남었다고 하지만 특공댄(特攻隊)지 정신대(挺身隊)지 고 악지 센 것들이 끝까지 일인일함(一人一艦)으로 뻣댄다면 아모리 물자 많은 미국이라고 일본 병정 수효만치야 군함을 만 들 수 없을거요. 일본이 망하기란 하늘에 별따기 같은 걸 기다리나 보오!"
현의 안해는 이 날도 보송보송해 잠들지 못하는 남편더러 집을 팔고 시골로 가자 하였다. 시골 중에도 관청에서 동뜬 두메로 들어가 자농(自農)이라도 하면서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살다 죽자 하였다. 그런 생각은 안해가 꼬드기기 전에 현도 미리부터 궁리하던 것이다. 지금 외국으로는 나갈 수 없고 어디고 하늘 밑인 바에야 그야말로 민불견리(民不見吏) 야불구폐(夜不狗吠)의 요순(堯舜) 때 농촌이 어느 구석에 남아 있을 것인가?
그런 도원경(桃源境)이 없다 해서 언제까지나 서울서 견딜 수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요 소위 시국물(時局物)이나 일문(日文)에의 전향이라면 차라리 붓을 꺽어버리려는 현으로는 이미 생계(生計)에 꿀리는 지 오래며 앞으로 쳐다볼 것은 집밖에 없는데 집을 건드릴 바에는 꼬깜꼬치로 없애기보다 시골로 가 다만 몇 마지기라도 땅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상책이긴 하다. 그러나 성격의 껍데기를 깨치기처럼 생활의 껍데기를 갈아 본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좀더 정세를 봅시다."
이것이 가족들에게 무능하다는 공격을 일 년이나 두고 받아오는 현의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