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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집을 팔지는 않았다. 구라파에서 제이 전선이 아직 전개되지 않았고 태평양에서 일본군이 아직 라바울을 지킨다고는 하나 멀어야 이삼년이겠지 하는 심산으로 집을 최대한도로 잡혀만 가지고 서울을 떠난 것이다. 그곳 공의(公醫)를 아는 것이 발련으로 강원도 어느 산읍이었다.
철도에서 팔십 리를 버스로 들어오는 곳이요 예전엔 현감(縣監)이 있었던 곳이나 지금은 면소와 주재소 뿐의 한적한 구읍이다. 어느 시골서나 공의는 관리들과 무관하니 무엇보다 그 덕으로 징용(徵用)이나 면할까 함이요, 다음으로 잡곡의 소산지니 식량해결을 위해서요 그리고는 가까이 임진강 상류가 있어 낚시질로 세월을 기다릴 수 있음도 현이 그곳을 택한 이유의 하나였다.
그러나 와서 실정에 부딪쳐보니 이 세 가지는 하나도 탐탁한 것은 아니었다. 면사무소엔 상장(賞狀)이 십여 개나 걸려 있는 모범 면장으로 나라에선 상을 타나 백성에겐 그만치 원망을 사는 이 시대의 모순을 이 면장이라고 예외일 리 없어 성미가 강직해 바른말을 잘 쏘는 공의와는 사이가 일찍부터 틀린데다가,
공의는 육 개월이나 장기간 강습으로 이내 서울 가 버리고 말았으니 징용 면할 길이 보장되지 못했고 그 외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공의의 소개로 처음 지면한 향교직원(鄕校職員)으로 있는 분인데 일 년에 단 두 번 군수 제향 때나 고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아나는 '김직원님'으로는 친구네 양식은커녕 자기 식구 때문에도 손이 흰, 현실적으로는 현이나 마찬가지의 아직도 상투가 있는 구식 노인인 선비였다.
낚시터도 처음 와 볼 때는 지척 같더니 자주 다니기엔 거의 십리나 되는 고달픈 길일 뿐 아니라 하필 주재소 앞을 지나야 나가게 되었고 부장님이나 순사나리의 눈을 피하려면 길도 없는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야 되는데 하루는 우편국 모퉁이에서 넌즛이 살펴보니까 네무라라는 조선 순사가 눈에 띄었다.
현은 낚시 도구부터 질겁을 해 뒤로 감추며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니 촌사람들이 무슨 나무껍질 벗겨온 것을 면서기들과 함께 점검하는 모양이다. 웃통은 속옷 바람이나 다리는 각반을 차고 칼을 차고 회초리를 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거드름을 부리고 있었다. 날래 끝날 것 같지 않아 현은 이번도 다시 돌아서 뒷산 등을 넘기로 하였다.
길도 없는 가닥숲을 젖히며 비 뒤에 미끄러운 비탈을 한참이나 해매어서 비로소 펑퍼짐한 중턱에 올라설 때다. 멀지 않은 시야에 곰처럼 시커먼 것이 우뚝 마주서는 것은 순사부장이다. 현은 산짐승에게보다 더 놀라 들었던 두 손의 낚시도구를 이번에는 펄썩 놓아 버리었다.
"당신 어데 가오?"
현의 눈에 부장은 눈까지 부릅뜨는 것으로 보였다.
"네. 바람 좀 쏘이러요."
그제야 현은 대패밥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하였으나 부장은 이미 팔뚝을 바라보는 때였다. 부장이 바라보는 쪽에는 면장도 서 있었고 자세히 보니 남향하야 큰 정구(庭球) 코트만치 장방형으로 새끼줄이 치어져 있는데 부장과 면장의 대화로 보아 신사(神社) 터를 잡는 눈치였다. 현은 말뚝처럼 우뚝히 섰을 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놓아 버린 낚시도구를 집어 올릴 용기도 없거니와 집어 올린댓자 새끼줄을 두 번이나 넘으면서 신사 터를 지나갈 용기는 더욱 없었다. 게다가 부장도 무어라고 수근거리며 가끔 현을 돌아다본다. 꽃이라도 있으면 한 가지 꺾어드는 체하겠는데 패랭이꽃 한 송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얼마 만에야 부장과 면장이 일시에 딴 쪽을 향하는 틈을 타서 수갑에 채였던 것 같던 현의 손은 날쌔게 그 시국에 태만한 증거물들을 집어들고 허둥지둥 그만 집으로 내려오고 말은 것이다.
"아버지 왜 낚시질 안 가구 도로 오슈?"
현은 아이들에게 대답할 말이 미처 생각나지도 않았거니와 그보다 먼저 현의 뒤를 따라온 듯한 이웃집 아이 한 녀석이,
"너이 아버지 부장한테 들켜서 도루 온단다."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