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진에 관해서는 도일에게 침묵을 지켰다. 다만 마음 속으로 그 가엾은 아가씨에게 도일이 좀더 따뜻하게 대할 날이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진으로 해서 그날의 그 아가씨의 맹랑한 행동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도일이 변한다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도일은 냉정한 녀석이며 자기가 옳다고 믿는 건 절대로 양보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처럼 지독히도 냉정한 녀석이지만 한 번 내게 거의 자제력을 잃고 무례할 정도로 화를 낸 일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녀석의 표정이 어찌나 불 같던지 나도 더럭 겁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그때 도일이 돌아왔다는 걸 알고 그의 방에 찾아갔다. 토요일 오후여서 녀석에게도 모처럼 시간이 난 듯했다. 그런데 방에 있는 줄 알았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불러내는 바람에 안방으로 건너가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녀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책상 위에 쓰다 만 편지 한 장이 뒹굴고 있었 다. 그건 영문편지였는데 그걸 쓰다가 바쁘게 뛰어나갔는지 아직 채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편지의 서두는 영문으로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양친께서는 그동안 안녕하신지요? 저는 양친의 도움으로 이곳 한국에서 잘 생활하고 있으며 매일매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메어리 누이동생도 공부 잘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번 보내주신 돈과 사진은 잘 받았어요.
내가 여기까지 읽어 내려갔을 때였다. 뒤에서 도일이 다가와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굴하게 뭘 훔쳐보는 겁니까?”
나는 질겁하고 책상 앞에서 물러났다. 도일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상기된 채 책상 위의 편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노려봤다. 나는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미안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만.”
“관두세요, 교양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남의 사신을 함부로 봐도 되는 거예요?”
도일은 의자에 가서 등을 돌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녀석은 말이 없었다. 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듯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도일은 갑자기 돌아앉더니 그 편지를 내게 불쑥 내밀었다.
“자,보십시오.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끝까지 봐두시는 게 좋겠죠.”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아니, 그게 뭔데 그러니? 그렇게까지 큰 비밀이 거기 있는건가?”
“하긴 아무것도 아니죠. 비밀도 아무것도 아니죠.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이 말을 쓸 때마다 난 목구멍에서 뭐가 넘어오는 걸 참는다구요. 아버지와 어머니께, 제기랄, 난 대체 아버지가 몇이나 되고 어머니가 몇이나 되는 겁니까? 이 세상 어른들이 모두 내겐 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문제라구요. 난 고아니까 말이죠.”
“왜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거지? 도일이답지 않게. 그런 편지 안 쓰면 되는 거 아냐?”
“안 쓴다구요? 이 편지로 난 매달 오백 불씩이나 벌어서 부모님께 바치고 있는 걸요. 만약 내가 이 편지를 안 쓴다고 가정하면 먹고 입고 학교 다니고 하는 데 누가 돈을 대줍니까?”
“아니,그거야 네 아버님께서.”
“아버님께서 이 편지를 쓰라고 하니까 쓰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뒤통수도 못 본 미국인에게 미쳤다고 사랑하는 양친 어쩌고 하겠어요? 이 편지는 사실 어제까지 양연회에 가져다줘야 하는 건데 난 써지지가 않아 이러고 있는 거예요. 방금 아버지에게 불려가서 이것 때문에 야단맞았어요.”
“내가 괜히 왔나보다. 나갈 테니 편지를 쓰렴.”
“아니에요,그냥 계세요. 오늘 아무래도 이걸 쓰고 싶지 않은 걸요. 이 집에서 쫓겨나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그동안 아저씨를 속인 것 정말 미안해요. 난 아주 나쁜 놈이에요.”
도일이 방바닥에 내려와서 한쪽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더니 갑자기 얼굴을 무를 사이에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녀석은 소리를 죽여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녀석이 지금껏 쌓아왔던 그토록 견고해 보이던 행복의 성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그 방에 있는 커다란 옷장이며 번쩍거리는 오디오 세트며 벽에 걸린 테니스 라켓 따위가 모두 한낱 무대를 꾸미는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은 있었다. 도일이 눈물을 보인 순간 나는 이제야 우리가 흉허물 없는 친구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건 이제 우리 사이에 더이상 거짓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