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네 아버지는 어느 아버지보다 너를 사랑하고 계시지? 어머니도 그렇고.”

 

“정말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어떤 때는 나 자신이 착각할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짝 놀라죠. 그런 때가 제일 견디기 힘들기도 하지만, 착각에서 깨어날 때 말입니다. 난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 기억을 더듬어봐도 아버지께서 내게 잘못하신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정말 완벽하신 분이지요. 아마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만큼 훌륭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될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만 뭐니?”

 

“아, 내가 이런 얘기 하면 누구나 나를 욕할 거예요. 나쁜 놈이라구 하겠죠. 관두겠어요.”

 

“뭔데 그러니? 하긴 싫으면 그만두는 게 좋아.”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미 이력은 아저씨가 다 알고 있는 걸요.”

 

도일은 벌떡 일어서더니 벽에 걸린 기타를 내려 들고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녀석이 어떤 상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갑자기 기타를 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도일의 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어떤 날은 녀석의 방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다. 도일도 가끔 내 방에 왔는데 내가 다섯 번 그의 방에 가면 그가 한번쯤 오는 꼴이었다. 우리는 그린하우스에 함께 가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먹거나 남비우동을 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다지 자주 그곳에 함께 가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그 가게에 손님이 붐비지 않는 저녁때나 일요일 오전 같은 때만 그곳에 갔던 것이다. 사람이 많을 때 우리가 그곳에 앉아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나는 정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정작 도일 자신은 태연하게 앉아서 여전히 큰소리로 우스스런 이야기를 계속하곤 했다. 녀석은 말솜씨가 제법이어서 그가 우스개소리를 할 때는 나도 이따금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아저씨하고 함께 있을 때는 지 마음이 든든해요. 혼자라면 아마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떠들 배짱이 없었을 거예요.”

 

그린하우스에서 나왔을 때 언젠가 도일이 한 말이다. 단순한 인사치레인 진심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도일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녀석은 아직도 뭔가 내게 비밀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도일이 조금이라도 거짓으로 나를 대했다는 건 아니다.

 

그는 정직했고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과장된 말투를 쓴다든가 실없는 소리 따위도 지껄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을 지내고 아침에 녀석을 새로 만날 때마다 도일에겐 어딘지 낯선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 낯선 느낌이 그의 피부빛 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나와 접촉이 그렇게 잦았고 어느 의미에선 거의 함께 살다시피 하면서도 도일의 화제는 늘 일정한 범위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농담도 잘하고 학교에서 일어났던 우스꽝스런 일이라든가 그가 읽은 책, 흑은 구경한 영화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극도로 말하기를 꺼리거나 화제에 인색했다.

 

내가 도일의 그런 점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녀석이 늘 화제를 앞장서서 엉뚱한 방향으로 교묘하게 이끌어갔기 때문에 미처 그걸 깨달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도일은 대학의 경영학과나 경제학과에 진학해서 장차 경제분야에 종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테니스를 새로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테니스 라켓은 이미 구입해서 그의 방 한쪽 벽에 걸어 두고 있었다.

 

아마 도일이 자신의 장래나 망에 관해 말한 건 고작 이 정도일 것이다. 보통 그 또래의 다른 학생이라면 으레 이성에 관한 홍미, 혹은 신앙에 관한 다소의 갈등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정상적 가족관계에서도 부모나 형제에 관한 갈등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절대의 사랑은 가능한 것인가? 하나님은 교회에 나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저절로 화제로 삼게 마련이다.

 

도일은 이성문제 같은 건 입에 담지도 않았고 신앙문제나 가족간의 문제도 녀석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이 녀석에겐 대체 고민이란 전혀 없는 것인가? 녀석은 오직 나날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일까?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었다.

 

우리 앞에 그 아가씨가 나타난 건 따라서 내겐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도일과 나는 한가한 낮시간에 그린하우스에 앉아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때 고등학교 학생 또래의 사내 아이들과 아가씨 하나가 가게로 들어와서 함께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들어오면서부터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그들의 좌석이 우리와 꽤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토록 떠들어대지만 않았던들 우리는 좀더 오래 그곳에 즐겁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녀석들은 마치 사 람들의 시선이 자기들에게 모이기를 열망하는 것처럼 계속 이상야한 억양으로 떠들어댔다.

 

“뭐야, 이건. 내가 너희들을 먹여살려야 하니?”

 

“새끼, 숙녀 앞에서 좀 점게 사면 안돼? 형님들 체면도 살려 주고 말야.”

 

뒤이어 아주 밝고 낭랑한 웃음소리가 가게 안을 진동했다. 옆에 있는 아가씨의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에 이끌려 나는 그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벼운 분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과 머리칼이 갈색이고 피부빛이 하얗기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 백색혼혈아였고 매우 매력적 용모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용모에 비해 그녀가 너무 경솔하고 우스꽝스럽게 처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을 받은 것도 그녀가 그만큼 아름다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때는 연민과 함께 공연한 불쾌감까지 느끼게 마련이다. 아름다움이란 제값에 어울리는 자리에 있어야 하고 어울리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세상의 보석들이 그렇듯이.

 

다행히 도일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쪽을 아직 못 보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들의 해괴한 말 소리와 아가씨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되풀이되자, 이윽고 도일이 뒤를 힐끗 돌아다봤다. 그 순간 도일의 얼굴이 빨개졌다. 녀석은 곧 눈길을 이쪽으로 돌리고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빨개진 얻굴의 홍조는 지울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도일은 어딘지 긴장하는 기색이 역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