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아이야?”

 

나는 가볍게 물었다.

 

“아뇨, 몰라요.”

 

도일의 대답이 약간 퉁명스럽게 들렸다. 그는 입을 굳게 닫고 굳어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나가자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도이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빨리 걸어나갔다. 그때 그 아가씨가 도일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긴장된 표정으로 움츠리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밖으로 나와서 도일과 나는 집 쪽으로 걸었는데 그때 도일이 말했다.

 

“저런 계집아이를 두고 바로 마네킨이라고 하지요. 바보 같은 계집애 . 사내애 들이 호기심으로 꼬여드니까 마치 자기가 공주가 된 기분인 모양이지.”

 

그는 화가 시 나 있었고 한심하다는 듯 몇 번이나 혀를 찼다. 그런데 우리가 불과 몇 발자국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뒤에서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얘, 얘,거기 좀 서 있어.”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바로 그 아가씨였다. 그녀는 가게에서 키들거릴 때와는 딴판으로 긴장으로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돌아선 도일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얼굴로 아가씨를 노려보았다.

 

“창피라는 걸 모르니? 왜 길 가는 사람을 부르고 야단이야.”

 

나는 도일이 그런 거친 말투를 쓰는 걸 처음 들었다. 녀석이 아가씨를 모른다고 내게 말한 건 거짓이었다. 녀석이 내게 거짓을 말했다는 것도 아마 이게 처음일 것이다. 우리 앞에 와서 선 아가씨의 얼굴이 긴장에서 약간 풀리고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도일에게 한. 싹싹하게 말했다.

 

“너 편지 받아봤지? 세 번씩이나 보냈는데 어떻게 된 거야?”

 

“편지 따원 받은 일 없어. 아버지께 내게 오는 것 중 불필요한 건 버리고 달라고 말했어. 알겠니? 쓸데없는 짓 그만두라구.”

 

“그럼 네 아빠가 그걸 갖고 있단 말이구나. 아이 참, 이걸 어떡하지?”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내가 그곳에 없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도일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도일에게 자기가 보낸 편지의 수신을 확인하는 그 아가씨의 모습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내게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도일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었을까? 그게 몹시 궁금했다. 가게에서 사내녀석들 속에 섞여 앉아 다소 천박하게 호들갑을 떨 때와 도일에게 달려온 그 아가씨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금방 그렇게 변모시키는 것일까? 그 점도 궁금한 일 이었다.

 

예상보다 도일은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가 분명 그녀에게 몇마디 욕지거리를 해주고 도망쳐 왔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좀더 잘 대해 주지 그러니? 그쪽은 널 잔뜩 좋아하고 있는 것 같던데.”

 

도일은 순간 사납게 나를 흘겨봤다.

 

“정신없이 사내들 속에서 놀다가 자기 혼자란 걸 문득 깨달으면 덮어놓고 내게 달려오는 걸요. 좋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난 그 계집애가 가까이 오면 소름이 끼친다구요.”

 

“예쁘던데. 굉장한 미인이야.”

 

“정신없는 계집애죠. 차라리 못생겼다면 그애를 위해 좋았을 텐데.”

 

“어떻게 알게 되었지?”

 

“양연에 갔을 때 만났죠. 오래 됐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없고 만날 생각도 없어요. 잘하면 곧 미국에 가게 될 거예요. 거기 양부모가 초청했다니까.”

 

“양연란 양부모를 찾아주는 곳이지.”

 

“뭐, 그런 곳이죠. 하지만 난 최근에는 가본 일도 없어요.”

 

녀석은 양연희 이야기를 몹시 꺼리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더 묻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 도일이 또 하나의 양부모를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도일도 그 얘기가 나올까봐 말머리를 돌리는지도 몰랐다.

 

도일의 입에서 양연회 얘기가 나온 건 나를 얼마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얼마간 나를 실망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녀석도 그걸 눈 치채고 재빨리 자기는 최근에는 그곳에 가본 일도 없다는 말을 강조하긴 했다.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도일이 그동안 내 앞에서 위선적인 행동울 해왔다는 혐의는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