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또는 중동의 어느 원주민들이 낯선 백인을 만나서 마음을 열고 친해질 때 손을 들어 상대방의 가슴을 가리키고 이어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한다.
"우리는 이제 친구다. 그러니 당신을 믿는다."
헐리우드 영화 같은 곳에서 드물지 않게 보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가 새삼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에서 통용되는 '친구'의 개념과 저들 원주민들의 그것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저들 원주민이 말하는 친구의 개념은 원래 잘 알지 못했던, 멀리 떨어져 다르게 살아왔던 타인들이 일정한 계기를 통해서 서로 신뢰를 쌓아 더 이상 경계의 절차가 필요없게 되는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말하는 친구는 '원래부터 같이 살아서 별로 경계할 필요가 없는 관계'라는 개념이 더 강하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가족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편한 사이 정도인 것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이질적인 존재와의 교류라는 경험이나 노하우가 무척 빈약한 한국 사회에서 혼혈인이라는 존재가 던지는 불편함을 다룬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유형의 작품이 흔히 빠지기 쉬운 소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작가의 시선이 향하는 지점이 혼혈인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담아내고 소화해내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있다는 점에서 그 점이 분명해진다.
이 작품이 드러내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예민한 상처와 쉽게 인정하기 힘든 굴절들로 이어진다. 마치 한 뿌리를 건드리면 불가피하게 다른 줄기의 처리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구근(球根) 식물 같다고나 할까.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일 수밖에 없는 혼혈인인 도일이 다시 그 한국 사회를 소외시키는 강자인 미국과 혈연으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겪는 이중적인 자아와 자기 위상의 혼란도 그 중 하나다. 작가가 시간과 여유를 갖고 이 주제를 계속 천착했으면 이 작품은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산줄기로 이어지는 이정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