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가루가 묻어 있는 그 손을 보고 상사가 말했다. 젊은 남자도 기요의 왼쪽 손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다시 기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기요에게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곧 입을 닫아버렸다. 그들은 파출소에서 나와서 다시 행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제 상사는 기요의 옆에 바짝 붙어서 걸을 필요가 없었다. 상사는 두어 발자국 앞서 걸어갔고 젊은 남자만이 어쩌는 도리 없이 기요와 나란히 걸어갔다. 그남자는 행인들의 시선으로부터 두 사람의 팔목에 채워진 수갑을 감추느라고 기요에게 더욱 가깝게 붙어서 걸었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는다면 그들 두 사람이 사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남자라면 이런 경험도 한번쯤 있어야지요.

 

바짝 옆에 붙어서 걷고 있는 젊은이가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는 이제 상대방이 도주할 염려가 없어졌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기요는 그가 위로삼아 하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교원 생활을 오래 했소?

 

젊은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기요에게 물었다.

 

몇년 되지요.

 

기요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표정이 몹시 딱딱하던 그 젊은 남자는 한결 부드러운 눈초리로 기요를 돌아다보았다.

 

아까는 사실 나도 혼났수다. 이 생활이 벌써 몇년째지만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구요.

 

어떤 경우 말인가요?

 

나도 고등학교 나온 지 몇년 안되거든요. 아까 복도에서 수업 끝나기를 기다릴 때는 참 난처했지요. 그것 참 못할 짓이던데요.

 

앞서 가던 상사가 뒤돌아보며 젊은 남자에게 물었다.

 

야, 김 병장. 너 여기서 파견대까지 몇 킬로쯤 되는지 알어?

 

글쎄요. 직코스로 가면 십 킬로쯤 되겠지요.

 

그럼 택시로 가자.

 

상사는 마침 그들의 옆에 와서 손님을 내려놓고, 곧 떠나려고 하던 택시를 잡아세웠다. 김 병장과 기요가 먼저 뒷좌석으로 올랐다. 기요는 가운데에 앉았고 상사와 병장이 기요의 양쪽에 각각 앉았다.

 

운전사 양반. 대방동까지 직코스로 가는데 말이지, 한번 최고 속도로 뽑아보쇼.

 

상사가 마치 부하에게 지시하는 사람처럼 운전사에게 말했다.

 

속도 위반에 걸리면 댁에서 책임지실 거요?

 

운전사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면 우리가 시방 드라이브나 하는 사람들같이 보이우?

 

상사가 짓궂게 다시 말했으나 운전사는 더 대꾸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택시는 수색 정거장 광장을 지나서 새로 포장된 널따란 도로로 들어섰다. 이 도로는 신촌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시가지를 벗어나면서부터 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반쯤 열어둔 차창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비껴 들어왔다. 그들은 잠깐 동안 도로 주변에 새로 조성되는 주택지구를 바라보느라고 말이 없었으나 병장이 곧 그 침묵을 깨뜨렸다.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텐데 어떻게 할 참이요?

 

그는 정말 딱하다는 표정으로 기요를 돌아다봤다.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만약 돌아갈 수가 있다면 꼭 돌아가고 싶은데요.

 

기요는 똑바로 앞을 보면서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얘길 듣고 보니까 우리들이 영락없이 악당들이 되었는데.

 

상사가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하기야 우리들이 찾아내지 못했다면 당신은 당분간 무사하게 교육자 노릇을 할 수가 있었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직업이고 잘못은 우리보다 당신에게 더 많은 거요. 당신은 좌우간 군대의 법을 어겼으니까.

 

꼭 불가능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죠.

 

병장이 다시 기요에게 말했다.

 

나중에 재판받을 때 검찰관이나 심판관에게 잘 말해보쇼. 혹시 아우? 정상 참작이란 것도 있으니까.

 

야, 임마 금년부터는 군기가 더 엄해져서 그런 것 없다구.

 

상사가 병장의 억측을 한마디로 부정했다.

 

오랫동안 무사했지만 결론적으로 당신은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구. 하필이면 금년에 와서 붙잡힐 건 또 뭐야. 정말 금년부터 군기가 훨씬 엄해졌다 이 말이오. 작년에만 붙잡혔더라도 혹 모를 텐데. 거기가보면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곧 알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