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사장은 한참 동안 저쪽과 러시아말로 통화를 했는데 상대가 블라지미르 본인은 아닌듯 했다. 전화에 시간이 꽤 걸렸다.

 

"아버지인데 지금 아들은 다른 곳에 있답니다. 페테르부르그에 있긴 있군요. 아들 연락처를 첨에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해서 설명하느라고 애먹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연락처로 정 사장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그가 한국말로 통화를 했는데 전화는 금방 끝났다.

 

"웬 한국 여성이 전화를 받네요. 아주 젊은 여성인 것 같은데. 어찌된 겁니까? 그 친구는 저녁 먹고 산책 나갔는데 곧 들어온답니다."

 

"그 친구 피앙세일 거요. 집을 나와 거기서 생활하나 봅니다."

 

피앙세란 블라지미르가 자기 연인을 말할 때 쓴 말인데 얼떨결에 내 입에서도 그런 호칭이 튀어나왔다.

 

"국내선 비행기로 가셔야지요. 그게 안전하고 편합니다."

 

정 사장이 공항까지 나를 자기 차로 배웅하겠다고 말했다.

 

"지난번에 기차는 탔으니 이번엔 비행기를 타볼까."

 

"그게 몇 년도였죠?"

 

"92년도. 쿠데타가 일어나서 의사당에 대포를 쏘고 옐친이 탱크 위에서 연설했던 직후였소. 미처 수리하지 못한 의사당의 깨진 유리창도 봤으니까."

 

"아이쿠, 그때라면 혼자 밤기차를 타는 건 완전히 몸을 도둑에게 내맡기는 거나 같았을 텐데요. 혼자가 아니었겠죠?"

 

"단체여행이었소."

 

이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블라지미르가 산책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정 사장이 송수화기를 내게 건네며 "끊지 마시고 제게 돌리세요."라고 말했다.

 

“정말 반갑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귀에 익은 블라지미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나도 발로자 목소리 들으니 기뻐요. 우리 내일 만납시다."

 

"저도 빨리 뵙고 싶어요. 내일 몇 시에 오십니까?"

 

"시간은 모르겠고, 내 옆에 있는 분이 알려줄 거요. 이년만인가? 그렇지요?"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이년반이 됩니다."

 

나는 안부조차 생략하고 송수화기를 정 사장에게 돌렸다. 정 사장은 세밀하고 꼼꼼했다. 블라지미르와 의논해서 금방 호텔을 정하고 비행기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을 그쪽에 알려줬다.

 

"쁘리발찌스까 호텔에 예약해 놓으라고 말해뒀어요. 미리 예약하지 않았다가 큰 낭패 당할 경우도 있거든요."

 

"그 호텔 안전한 곳인가?"

 

박 교수가 제자에게 물었다.

 

"그 친구가 추천했으니 걱정없을 겁니다. 저도 두어 번 묵었던 곳이에요.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발틱 해가 바로 앞에 보이죠. 이 친구 숙소에서 아주 가깝다니 잘 된 거지요. 그런데 블라지미르라는 이 젊은 친구, 한국말을 어디서 배웠죠? 아주 정확한 우리말을 구사하는데요."

 

정 사장이 무척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페테르부르그는 모스크바와는 달리 전보다 더 도시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블라지미르도 얼굴이 마르고 표정도 밝지 못했으며 조금 지친 듯 보였다. 느지막한 오후 내가 뿔까보 공항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갔을 때 블라지미르는 출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서있는 그 모습이 왠지 몹시 쓸쓸해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그제서야 그가 활짝 웃었다. 우리는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호텔까지 길이 멀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서 우리는 호텔에 도착했다.

 

한적한 바닷가에 자리 잡은 호텔은 마음에 들었다. 방은 6층인데 후면의 창을 통해 발틱해가 눈앞에 전개되는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벌써 밤이 되어 바닷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개를 끌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근처 주민들과 호텔에서 그쪽으로 산책나간 외국인들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참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하시죠?"

 

깜박 잊고 있었던 듯 블라지미르가 낭패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경기가 안 좋아서 호텔 식당도 지금쯤 문을 닫았을 겁니다. 8층에 한국식당이 새로 문을 열었다는 얘긴 들었는데 제가 프런트에 알아보죠."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본 블라지미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문을 열긴 했는데 지금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군요. 지하에 나이트 바가 한 곳 있는데 거기라도 가보시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어두운 복도를 돌아가자, 큰 홀이 나타났다. 홀에는 객석이 있고 무대가 있었다. 객석은 텅 비어있고 무대 위에서 남자 몇 사람이 전기 기타와 콘트라베이스와 색소폰을 각자 들고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영업시간 전이었다. 이런 곳에서 술이라면 모를까, 저녁식사를 찾는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내가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으나 블라지미르는 무대 위로 혼자 올라갔다. 그들과 잠시 얘기한 뒤 그가 돌아와서 말했다.

 

"여기서 부족하나마 간단하게 식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식 식사는 안 되고 자기네 먹는 음식을 조금 나눠주겠다는데요."

 

"아는 친구들이오?"

 

"오늘 처음 봤습니다."

 

"뭐라고 말했기에 그런 호의를 베풀지요?"

 

"사실대로 얘기했어요.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다고요."

 

잠시 후 젊은 남자가 빵과 샐러드와 약간의 캐비아를 담은 접시 하나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들 덕에 뜻밖의 장소에서 제법 그럴싸한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내가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색소폰을 들고 있는 남자가 손을 저으며 블라지미르에게 "당신 친구를 우리도 환영한다."고 말했다. 물론 블라지미르가 즉석 통역을 해줘서 나도 그 친절한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호텔은 독일인 여행자들로 북적거렸다. 대부분 단체로 온 사람들인데 일정을 끝내고 떠나려고 짐을 끌어내는 사람들과 어제 막 도착해서 하루 일정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독일말 발음은 억양의 강세가 심해서 두 세 사람만 모여 얘길 해도 로비 전체가 찌렁찌렁 울렸다.

 

이 호텔에 독일 여행자들이 많이 몰려오는 이유가 있었다. 블라지미르의 설명에 의하면 이 독일인들은 대부분 전에 이 지방에서 대를 이어 거주하던 사람들로 사회주의 기간 중 본의 아니게 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이제 문이 열리자, 그리던 옛 고향을 찾아오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행자 대부분이 노년층 일색이었다.

 

나는 로비에서 아침에 오기로 한 블라지미르를 기다렸다. 그가 좀 늦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호텔 정문 밖에서 옥신각신 다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블라지미르가 현관을 지키는 경비원과 얼굴을 붉히며 다투고 있었다.

 

현관에는 무전기를 든 경비원 두셋이 언제나 지키고 있는데 그들은 주로 러시아인들의 출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제야 경비원이 옆으로 물러났다.

 

"무슨 일로 그러죠?"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어제도 왔고 친구가 있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에요. 친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겁니다."

 

블라지미르가 몹시 기분이 상했는지 분노어린 눈길로 경비원을 쏘아봤다. 그는 어제와 달리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수염도 깨끗이 밀었고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찾아온 친구의 기분을 위해 특별히 자기를 꾸미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햇빛이 밝았고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블라지미르는 내가 못 본 명소를 안내하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그보다 페테르부르그에 왔으니 네브스키 사원에 가서 방문인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장미 두 송이를 사서 하나는 도스또에프스끼에게, 하나는 차이꼽스끼 앞에 바쳤다. 페테르부르그에 왔다는 인사를 치른 셈이었다. 공원 안을 천천히 거닐다가 어떤 조그만 반신 석상 앞에서 블라지미르가 걸음을 멈췄다.

 

"이 사람은 우화작가 끄롤로프인데요. 어릴 때 학교에서 끄롤로프의 <양과 늑대>라는 우화를 배웠던 생각이 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 우화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에요."

 

"어떤 얘긴데요?"

 

"간단히 말하면 힘있는 자는 죄가 없고 힘없는 자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긴 조금씩 차이가 날 뿐 어떤 나라에나 있겠지만 우리 러시아에는 아주 적절한 얘기입니다. 양과 늑대가 어느 날 물을 마시러 냇가로 나갔어요. 늑대는 위에서, 양은 아래에서 물을 마시는데 늑대는 사실 양을 잡아먹고 싶었어요. 그래서 늑대가 양에게 말했어요.

 

-너 때문에 내가 마실 물이 흐려졌다. 그러니 나는 너를 잡아먹겠다.-

 

양이 말하기를

 

-나는 아래에 있는데 어떻게 물을 흐릴 수가 있는가? - 이렇게 항변했죠.

 

그랬더니 늑대가 뭐라 한줄 아십니까?

 

-너의 죄는 나만큼 힘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당시나 지금이나 이 우화는 우리 러시아 사회에서 진실로 통하고 있어요."

 

블라지미르는 기회 있을 때마다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끄롤로프 반신상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도 다만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네브스키 사원을 나와 골목을 조금 걷다가 사람들 왕래가 잦은 큰 길이 나왔는데 그다지 넓지 않은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그들 옆으로 다가갔다. 광장 가운데 레닌의 자그마한 흉상이 서있고 사람들은 그 흉상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그들은 붉은 바탕에 검정색과 흰색으로 글씨를 쓴 플래카드를 흉상 주변에 걸어놓기도 했고 비슷한 깃발을 손에 들고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붉은색 완장을 팔에 두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노인들이었고 차림새도 초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