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과, 집념과, 아름다움의 절정.......
이 9월의 바람결에 우리는 연기처럼 흩어지자.
소중한 사람이여, 이 가을 속삭임 속에 너를 모두 지워버리고
기절을 하거나 반쯤 미치려무나!
*유리 지바고 시집 <가을>의 일부
열매는 하나도 없이 앙상한 가지와 잎사귀만 내민
무화과나무가 저만치 앞에 솟았다.
주님은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이더냐?
거기 맥빠져 서있는 네게서 나는 어떤 기쁨을 얻겠느냐?
* 유리 지바고 시집 <기적>의 일부
시들이 너무 길어 일부만 발췌했고 일부 번역은 필자 취향으로 약간 수정했다. 이밖에도 <의사 지바고> 말미에는 많은 시들이 지바고 시집이란 표제로 수록되어 있다. 앞에 인용한 시들은 특히 내가 좋아하고 암송하던 시편들이다. 다음은 1997년 월간 <말>지 3월호에 필자가 썼던 글 일부를 옮겨본 것이다.
-내가 특히 매료된 것은 책 말미에 나와 있는 '지바고 시편'들이었다. 빠스테르나크는 그의 경력에 나와 있듯 본래 일급의 서정시인이었다. 그는 한때 혁명시인 마야꼽스끼 등과 함께 시작활동을 했으며 세익스피어 등 서구의 고전을 번역하는 일에 오래 종사했었다. <의사 지바고>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소설인 것이다. <지바고의 시편>은 소설의 에필로그 형식으로 나와 있고 여주인공 라라에 대한 애정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시들은 서정시로 일류의 품격과 짜임새를 뽐내고 있다.
이미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작가의 분신이라는 추정이 정설로 되어 있지만 이 시들을 읽어보면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게 된다. 이 서정시들은 인간과 자연의 융화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으며 인간 감정을 고귀하게 정화시켜 주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 시들 속에서 한층 높은 품성과 생명력을 가지고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시편들의 세계는 소설 <의사 지바고>의 세계와 연결되고 소설의 또 다른 압축된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세의 젊은 나는 금호동 산동네 언덕배기, 코스모스가 한창 피어있던 곳에 파묻혀 앉아서 이 소설을 읽느라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한동안은 이 소설과 지바고의 시편들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오죽했으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네 어느 아가씨에 보낸 장문의 연서에다가 ‘라리사 표도로브나에게’라고 썼을까. 그 편지를 써서 보내놓고 보니 내 이름도 빠트리고 보낸 것을 알았다. 결국 그쪽 이름도 이쪽 이름도 빠진, 그야말로 누구 말처럼 ‘주어가 없는’ 연서가 되어버렸으니 실패를 한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다.
잠시 얘기가 옆길로 빠졌는데 오후 두시 경에 우리를 태운 버스는 숲이 우거진 페레델키노 마을에 도착했다. 가이드의 말대로 그곳에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었고 겉으로 보면 넓은 농토에 고작 십여 채 주택들이 서로 거리를 두고 흩어져있는 한적한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지바고 기념관은 미니 이층 목조건물인데 최근에 만들어 붙인 듯한 빠스테르나크 얼굴 동판과 이름을 새긴 표지판이 눈길을 끌었다. 이 건물에서 빠스테르나크는 말년 한때를 보냈고 1960년 5월 30일 여기서 다난했던 삶을 마감했다.
하필이면 관리인도 출타중이라고 해서 내부 구경도 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일행들은 바깥에서 집 주변만 빙빙 돌면서 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들을 찍었다. 그런데 페레델키노에 가자고 했을 때 그렇게도 시큰둥해 하던 동료들이 막상 그곳에 와서는 사진을 찍어대느라고 여념이 없는 걸 보고 나는 한동안 실소를 머금었다. 이른바 증명사진을 찍어대는 것이다.
모스크바나 다른 도시를 보면 푸시킨 기념관은 한 두 곳이 아니고 규모도 크고 관리도 아주 잘되고 있다. 내가 두세 번씩 찾아갔던 모스크바 톨스토이 기념관도 비교적 관리가 잘되고 있었으며 볼거리도 많이 있었다. 톨스토이의 경우 물론 그의 영지인 야스나야 팔리아나는 거대한 궁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구역이 넓고 건물들도 여러 채가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1995년도에 혼자 야스나야 팔리아나에 찾아간 적도 있고 2005년 러시아 여행시에는 그곳에서 열린 규모가 큰 작가 미팅에 참여하느라고 두 번째로 그곳에 갔었다.
작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솔제니친 기념관은 내가 알기로는 모스크바 중심가에 제법 큰 빌딩으로 지어져 있다. 그곳이 건축 중일 때 그 앞을 지난 적이 있는데 큰 이변이 없었다면 솔제니친 기념관은 도심에 현대식 건물로 세워졌을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빠스테르나크 기념관은 그의 삶 자체가 그랬듯이 장소도 외진 곳이고 규모도 초라하다고 볼 수 있다.
모스크바의 일정은 일반 패키지 여행객들 일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게으르고 심통쟁이인 가이드는 되도록 일정을 단순화시키고 빨리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높이가 537미터가 된다는 오스탄키노 TV 송전탑에 갔던 일,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고 설비도 시원치 않은 어느 한식 식당으로 끌려가서 한국 음식을 먹은 일 정도이다.
이 송전탑은 남산의 <서울 타워> 와 성격이 비슷해서 360도로 회전하는 전망대에 올라가면 드넓은 모스크바 시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그런데 당시 워낙 기분이 저조했던 탓인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전경이 지금 조금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한식 식당은 북한 쪽에서 운영하던 곳이라고 기억된다. 개방 초기라면 당연히 그쪽 운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남측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이 여남은 곳이나 성업하고 있는데 그때 그 식당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스타니스라프스키 연극학교로 일찍 유학 와서 연극을 배운다는 삼십대의 연극학도가 찾아와서 우리를 집시들의 이상야릇한 춤판이 벌어진 호텔로 데려가 자기 돈으로 보드카와 캐비어를 곁들인 보리빵을 대접해주던 일이 그나마 모스크바의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동포라는 연대감과 작가에 대한 호의로 그 젊은 연극학도는 거금을 투척했으리라.
모스크바라는 도시를 며칠 사이에 둘러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생각이다. 그렇긴 하나 짧은 일정이라도 푸쉬킨 기념관이나 발쇼이 극장, 국립 모스크바 대학 캠퍼스 방문 같은 것이 작가 일행의 스케줄에 포함되었더라면 보다 뜻있는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푸쉬킨 기념관은 제명과 달리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그곳에는 칸딘스키, 샤갈, 세잔느, 피카소의 그림들이 있고 특히 샤갈의 경우는 마치 그의 모든 작품을 독점하고 있지 않나 의심이 갈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뒷날 세잔느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받았던 감명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림에 평소 눈이 어둡다고 자인하던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자, 이제 ‘핀란드역으로!’가 아니고 그 역과 가까운 도시인 페테르부르그를 향해 모스크바의 ‘레닌 역으로!’ 갈 차례이다.
모스크바에는 페테르부르그로 가는 레닌 역이 있고 페테르부르그에는 모스크바로 가는 모스크바 역이 있다. 서로 그렇게 해서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도시가 우의를 다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페테르부르그는 이름을 우리네 정당처럼 자주 바꿔서 초기에는 혼란스웠다. 비행기로는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인데 열차로는 밤을 새워 달려야 겨우 이틑날 아침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속도가 개선되었겠으나 밤 시간에 느리게 달려가는 열차 시간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라스꼬리니코프의 도시, 네바강의 도시인 페테르부르그는 모스크바처럼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기한 경관이나 이름난 명승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나는 여행을 갈 때, 특히 외국여행의 경우 현지에서 새로운 친구나 인물과 만나고 사귀는 것을 여행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땅에서 다른 언어와 풍속으로 살아온 인간과 만나 서로 대화하고 생각을 교환하는 것, 그것이 '여행의 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늘 그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모스크바는 경황없이 스쳐갔고 페테르부르그에서는 어떻게 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