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페테르부르그를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지미르는 피앙세와 함께 호주로 건너갔다. 시드니의 대학에서 한번 와보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그건 채용 전에 치르는 일종의 면접이었다. 그는 일단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소식은 그가 그곳에서 보낸 엽서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는 피앙세가 그곳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다행이라고 엽서에 적었다. 그리고 한달쯤 뒤에 드디어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둘이 함께 한국으로 왔다. 그때만 해도 이제 먹구름은 흘러가버린 듯 보였다.
결혼식은 신부 고향인 남쪽 항구도시에서 치러졌는데 주례 부탁을 받은 나는 여나믄 명의 동료 작가들과 그리고 건국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던 페테르부르그 출신 쯔베또프 교수와 함께 남쪽 항구도시로 내려갔다. 아파트 마당에 눈이 무릎까지 쌓였던 한겨울이었다고 기억된다. 쯔베또프 교수는 솔제니친, 푸쉬킨 등의 연구서적을 대학에서 출간하기도 한 원로 문학교수로 그가 계약기간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블라지미르를 통해 두어 차례 더 만나기도 했다.
그 항구도시에 도착해서 시간이 조금 남아 시내 산책을 했는데 그때 나는 블라지미르가 한국 고대사, 특히 가야사에 유독 많은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그의 피앙세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 항구도시가 가야 역사의 중심 무대와 지척에 있었던 것이다.
그날 식장에서 나는 신부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아담한 체구에 선이 갸름한 전형적인 한국의 미인형이었다. 식장은 지방도시의 유지들과 신부의 가족 및 친지들로 가득 메워졌다. 블라지미르는 예식에서는 양복을 입었지만 식이 끝나기 바쁘게 한복 저고리와 바지로 갈아입었는데 한복이 무척 잘 어울렸다. 그는 초혼의 신랑답지 않게 기쁜 마음을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냈다. 얼굴에서는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결혼식장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신랑을 처음 봤다.
재미있는 것은 블라지미르의 장인 어른이 그 지역에서 예식장을 오래 운영해온 분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결혼식은 자기네 예식장에서 치렀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내가 식을 마치고 그 장인어른으로부터 직접 건네받은 '주례사례비'가 상당한 고액(?)이었다는 점이다. 사례비를 담은 그 흰 봉투에는 붓으로 다음 같은 치사의 말이 적혀 있었다.
-주옥 같은 주례의 말씀, 너무나 감명 깊었습니다.
하긴 식장에서 주례를 서고 있을 때 거기 모인 유지들의 반응을 보더라도 블라지미르 장인 어른의 이 치사는 허언이 결코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동행했던 동료 작가들마저 새삼 놀랐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내가 그때 신랑신부를 앞에 두고 무슨 얘길 했는지 지금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나의 블라지미르를 향한 진실한 우정이 그런 좋은 반응을 얻게 만든 게 아닐까 생각될 뿐이다.
고액의 사례비는 동행했던 동료들과 바닷가 횟집에서 우리끼리 한바탕 '러시아 여행 회고' 잔치를 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다.
결혼식을 마친 블라지미르 내외는 다시 호주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 뒤 웬일인지 일 년 가까이 소식이 끊어졌다. 나는 호주 생활이 너무나 즐거운가보다고 멋대로 생각했다.
일 년쯤 지났을 때 어느날 밤 갑자기 모스크바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를 집어들자, 뜻밖에 블라지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주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거기 있느냐고 묻자, 그는 풀 죽은 목소리로 호주에서는 일주일을 못 넘기고 금방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가 결혼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경력이 풍부한 다른 러시아 교수가 와서 그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갈 곳이 없어진 블라지미르 내외는 모스크바로 가서 방 한 칸을 빌려 그곳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블라지미르는 그동안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그 대학에서 한 달에 50달러를 받는 임시강사로 근무해왔다. 지금 그 자리마저 계약기간이 끝나가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그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블라지미르가 그동안 소식을 끊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그때부터 블라지미르는 내게 타이프로 친 영문이력서를 몇 차례 보내오기도 했고 전화로 곤궁한 상황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는 내게 보낸 것과 같은 영문이력서를 끊임없이 타이프로 작성해서 영국으로, 호주로 계속 보내고 있었다. 그의 전화를 통해 간간이 페테르부르그의 소식도 전해 들었다. 블라지미르 자신도 최근 일년 동안 그곳에 찾아가지 못했고 겨우 전화로 페테르부르그 소식을 듣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전한 소식에 의하면 그의 부모님은 이스라엘로 귀환하기 위해 살던 아파트도 처분하고 한때 짐까지 꾸려놓았는데 아무래도 페테르부르그를 떠날 수가 없어서 출국을 미루다가 지금은 귀환 자체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핀란드의 트럭운전사와 재혼한 누이는 남편이 무뚝뚝하긴 해도 착한 남자여서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림쟁이 빠샤, 그는 지금도 술병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하루걸러 네프스끼 대로에 나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블라지미르의 전화를 받는 일이 내겐 전처럼 반갑거나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방 한 칸에 한 달 50달러로 살아야 하는 생활이 대충 어떤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대학과 별로 인연이 없는 나는 겨우 얼굴 정도 아는 교수 몇 사람을 만나 블라지미르가 보낸 영문이력서를 보여주고 그의 취업 문제를 의논했다. 알다시피 한국 대학에 자리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그들은 이력서를 자세히 보려고 하지도 않고 머리부터 흔들었다. 제일 큰 약점이 경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 표현대로 하자면 검증이 전혀 안 된 외국인을 대학에서 받아주는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궁리 끝에 차선으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학원 몇 군데를 찾아갔는데 두어 곳은 경영자를 만나지도 못했고 겨우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러시아어 수강생이 점점 줄어들어 과목을 폐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온 몸에서 기운이 쭈욱 빠졌다.
지금껏 붓 한 자루에 의지해서 살아온 백면서생인 내가 누구를 취업시킨다는 건 처음부터 아주 무모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은 이 무모한 의도를 외면하지 않았다. 신앙이 따로 없는 나는 그 신이 어떤 신인지는 모르지만. 그 신은 평소에는 내가 하는 일에 티끌만한 관심조차 주지 않던 아내로 현신(顯身)했다. 내가 며칠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서울 나들이를 하고 귀가할 때마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어대는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어느 날 문득 물었다.
"당신, 요즘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쏘다니세요?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
나는 한참만에 겨우 ‘그때 외국어를 잘하려면 그 나라 여성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말하던 그 러시아 청년 얘기를 들려줬다. 단순한 성격의 아내는 짧게 한마디만 했다.
"그럼 우리 엄마에게 한번 부탁해 봐요."
나이가 많아도 막내인 아내는 친정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장모님에게 취업을 부탁?'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는 처가에 무슨 부탁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 다른 사위들처럼 장모님과 평소 살갑게 지내지도 못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모님에게 난생 처음 부탁을 하긴 했다.
마침 그 무렵 블라지미르는 서울의 K대학에 이력서를 보냈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 K대학의 최고경영자의 장모님(이 부분은 참 쓰고 있는 나도 좀 그렇긴 하다. 그러나 신이 하시는 일이란 언제나 인간의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금 어색해도 사실대로 기술해서 신의 오묘한 조화를 그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과 나의 장모님이 막역지우였다. 나의 장모님은 사위가 처음 부탁한 일을 일초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실행으로 옮겼고 매우 긍정적인 해답을 얻어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K대학 해당 계열의 교수들이 검증되지 않은 젊은이를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때는 최고경영자라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마침 그 대학 문과계열에 동료작가 C가 있는데 그는 고참 교수일 뿐 아니라 캠퍼스 안에서 신망도 두터운 인물이었다. 마침 서울에 와 있던 블라지미르를 대동하고 서초동 찻집에서 C를 만났다. C가 즉석에서 그 문제라면 자기가 총대를 메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교수들을 설득하겠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해서 블라지미르는 K대학 교수로 무난히 취업을 했다.
대학에서는 경력자가 우선한다. 그가 오슬로대학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서울에서의 경력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에서는 처음에 사당동의 반지하 방을 얻어 살기도 했고 잠원동인가 어디에서 빈 집 이층을 잠시 빌려 살기도 했다. 낮에는 대학에 나가고 오후 늦은 시간에는 건국대로 가서 취업 외국인 근로자를 상대로 한국어와 한국역사 강의 봉사를 거르지 않고 했었다. 가끔 우리 집에 들르기도 했는데 항상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정상 강의와 무료봉사 강의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했으니 땀이 멈출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년치 수입을 모아 아내의 귀국연주회를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에서 열어주기도 했다. 그만큼 아내에게도 지극정성이었다. 서울에서는 주거가 그렇게 초라했는데 몇 해 전엔가 나더러 오슬로에 오시면 이제 자기 집에 묵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방이 서너 개인 큰 단독주택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본래 블라지미르가 내게 약속한 것은 러시아 동남 쪽 고도인 노보고로드를 나와 함께 여행하며 나를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러시아 역사의 모든 유물이 고스란히 살아있다고 그는 말했었다. 그러나 아직 그 약속은 서로의 상황이 맞지 않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 밤 정거장에서 라면 열 봉지를 매개삼아서 서로 '친구'가 되자고 했던 약속은 때로 신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잘 지켜온 셈이며 나는 이 우정의 경험을 결코 작지 않은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