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작가들과의 상견례 만찬, 왠지 첨부터 반신반의하긴 했다. 출발 전 그런 얘긴 듣도보도 못했고 그 협회라는 곳이 그런 프로를 준비해낼 만큼 힘이 있는 곳도 아니다. 그래도 곧 현지 작가들이 찾아온다니 일행들은 방과 만찬장을 왔다갔다 하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귀한 손님들을 기다렸다. 아마 오후 7시부터 9시가 넘어 반에 이를 때까지 배가 고픈데 저녁도 먹지 않고 진객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서울이라면 이름께나 알아주는 작가들이 수두룩했다. 최인훈도 있고 <무진기행>으로 나중에 영화의 메가폰까지 잡던 김승옥도 있고 충청도 사투리의 도사라고 할 이문구도 있고 젊은이들에게 한창 인기를 끌던 박범신도 있고 그밖에도 이름 있는 중견시인, 도도한 자존심의 여류작가 등 면면들이 결코 만만치 않았으나 넓으나 넓은 러시아 땅에 초면으로 와서는 마치 비맞은 장닭들처럼 초라하고 초췌한 얼굴로 고명하신 러시아 작가들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들은 오지 않았다. 아홉시 반을 지나 작가들을 대신해서 러시아작가 협회에서 나이 지긋한 장년 남자 한사람이 만찬장에 오긴 했는데 그의 말인즉
“작가들이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해서 올 수 없다는 말을 대신 전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 남자는 아마 작가협회 수위를 보거나 혹은 말단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인 듯했다. 그 사람은 우리가 함께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붙들어도 자기도 바쁘다며 작별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버렸다.
우리는 누굴 원망하고 비난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 일보다는 당장 허기를 채워주는 일이 더 급했던 것이다.
왜 그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걸까. 첨부터 그 협회에 큰 기대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일행들은 그걸 꼬치꼬치 따져볼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내가 고려인 작가 아나톨리 김에게 그 얘길 들려줬더니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 중간에 착오가 있었던 거지, 러시아 작가들이 카레이스키 작가들을 경시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첫날부터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을 겪고 나서 우리는 침울한 기분으로 모스크바의 첫 밤을 보냈다.
첫날 러시아 작가들을 기다리느라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뜻밖의 얼굴이 그곳에 나타났었다. 국회의원 장00씨다. 평화민주당인가 소속 의원으로 전두환 청문회 때의 활약으로 낯이 많이 익었다. 내가 보기에 당시에는 이인제 씨 못지않게 유망해 보이던 국회의원인데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정계에서 볼 수가 없다. 그와 따로 안면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객지에서 아는 얼굴을 보니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반가워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여기 언제 오셨지요?"
"아, 저희는 하루 전에 왔습니다. 저는 총재님을 모시고 왔는데 작가님들이 오셨다기에 거리도 가깝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장 의원은 인상 좋은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DJ가 지금 여기 와 계시다고요?"
"여기서 가까운 메트로폴 호텔에 지금 묵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찾아뵙고 인사라도 드려야 할 텐데."
"저와 함께 가십시다. 잘 아시죠? 무척 반가워하실 겁니다."
장 의원은 당장이라도 나를 메트로폴 호텔로 안내할 기세였다. 그러나 일행이 있는데 첫날부터 혼자 표가 나게 행동하는 건 적절치가 않았다. 나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장 의원과 헤어졌다.
DJ가 묵고 있다는 메트로폴 호텔은 문자 그대로 일급호텔이다. DJ는 본래 다독가에다 박학한 분이지만 북방개척에 관심이 많기 때문인지 러시아 쪽 외교에 많은 열정을 쏟은 것은 알려진 그대로다. 당시 아마 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학위를 받는 일로 러시아를 찾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 DJ를 상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그때 얘기를 했더니 DJ는 그 특유의 전라도 억양으로
"그때 오지 그랬어? 왔더라면 용돈이라도 줬을 텐데" 이런 말을 하며 웃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보니 좀 아쉽긴 했다. DJ는 손이 커서 용돈이라도 나 같은 사람에겐 거금(?)을 주셨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구차한 얘기지만 러시아 여행 당시 내가 휴대한 외화는 아마 정식으로 납부한 여행경비 외에 기껏해야 4백~5백 달러 미만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행할 때 물건을 마구 사서 짐을 늘리거나 하다못해 사진을 찍어대는 그런 취미조차 없기 때문에 따로 큰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여러 가지로 일진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날 오전 현지에서는 관습대로 가이드란 남자가 나왔는데 이십대 후반쯤 보이는 이 남자는 옷차림도 후줄근하고 머리도 빗질조차 하지 않았는지 잠자리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머릿결이 헝클어져 있었다. 그 남자는 잠바 주머니에 손을 꾸욱 집어넣고 무슨 말을 묻기만 하면 아주 서툰 한국말로 무조건 "모른다"만 되풀이했다. 그는 성의도 없지만 한국말도 가이드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 남자와 부딪쳤다.
"당신, 빠스테르나크를 알지요? 보리스 빠스테르나크."
그 남자는 흠칫 놀라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무슨 귀찮은 요청을 하려고 그러느냐는 표정이다.
'페레델키노, 여기서 차로 얼마나 걸리나요?"
그는 무조건 머리를 흔들었다.
그곳은 아주 멀리 있고 가봐야 볼 것도 없다고 손짓 발짓 섞어가며 말했다. 그러나 한동안 승강이 끝에 차로 한 시간 거리 이내에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래도 아무도 거기 안 갈 거요."
가이드가 주위에 서있는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후에 크레물린 광장에 가서 레닌 영묘도 보고 크레물린 궁 전시실로 들어가 제정시대 마차라던가 여왕의 장신구 등을 구경할 계획 때문에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주변 동료들도 가이드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렇다면 혼자 택시를 타고 페레델키노에 가겠다고 나는 말했다. 크레물린보다 레닌의 영묘보다 내게는 페레델키노가 더욱 찾고싶은 곳이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마음이 움직여 나와 동행하겠다는 희망자가 점점 불어났다. 결국 버스 전체가 크레물린이 아닌 페레델키노로 향해 달리기로 방향을 바꿔버렸다. 페레델키노를 서둘러 둘러보고 남은 시간에 크레물린에 간다는 것으로 일정을 바꾼 것이다.
내가 빠스테르나크를 읽은 것은 대학 신입생이던 1959년 가을이었다. 이딸리아를 통해 지하출판물이 흘러나와 서구에서 유행이 되고 그해 서울에서도 양장본으로 <의사 지바고>가 출간되었다. 책을 살 돈이 없어 친척집에 갔더니 그 책이 있어 염치불고하고 책을 빌려다가 한동안 돌려주지도 않고 두번 세번 그 러시아 리얼리즘의 마지막 기념비가 되는 소설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