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베네치아! 페테르부르그의 매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듯하다. 블라지미르는 네바강의 물빛이 계절 따라 바뀐다고 말했는데 이 말에는 그의 페테르부르그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과 자부심이 스며있었다. 페테르부르그는 물론 거저 생긴 도시는 아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 사이에 100여 개 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365개의 다리가 섬과 섬을 연결한다 하니 이 도시 건설에 얼마나 막대한 인력이-더구나 지금처럼 건설장비가 발전되지도 않은 때에-소모되었는지 알만하다. 앞서 얘기한 성 이삭 성당만 하더라도 건축 기간이 40년에 이른다고 한다.

 

페테르부르그에서는 저녁 빈 시간을 이용, 두 차례의 공연 관람을 했다. 한번은 발레 공연장에 가서 갈라 공연을 봤고 한번은 무소르그스키 극장이란 데 가서 가극 <리골레토>를 관람했다. 그런데 내용은 별무신통이었다. 아마 몇 달 전, 적어도 몇 주 전에 좋은 공연을 예약하고 관람을 해야 하는데 갑자가 뜨내기들이 몰려와서 공연을 보겠다고 하니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발레 공연장은 우리들 말고 몰려든 도시 서민들로 어수선했다. 그들은 입장료가 1달러도 되지 않은 반 공짜 손님인데 그들이 이 공연장의 주인들이었다. 정확한 액수가 기억나지 않지만 외국인은 현지인의 오십 배 가량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게 러시아 당국의 정책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등 잘 알려진 레퍼토리의 하일라이트를 짜깁기한 이 갈라 공연은 그런대로 러시아 발레의 수준을 보여주긴 했으나 공연장의 소란스런 분위기 탓인지 집중이 되지 않아 별다른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오페라가 공연된 무소르그스키 극장은 너무 낡았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가수들의 가창력도 서울에서 듣던 노래들보다 되레 수준이 떨어질 만큼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러시아의 성악은 남성 저음을 제외하면 의외로 수준이 높지 않다고 늘 느껴왔는데 그걸 현지에서 재확인한 셈이었다.

 

도스또에프스끼, 마지막 날 우리는 페테르부르그의 이 기인에게 하직인사 겸해서 그가 빚에 쪼들리며 말년에 글을 쓰고 살았다는 그의 기념관으로 찾아갔다. 그곳은 주택가의 좁은 골목 사이에 끼어있는 평범한 벽돌 이층 가옥이었다. 입구에 작가의 얼굴을 새긴 동판이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금도 주민이 거주하는 평범한 주택으로 보고 지나쳤을 것 같다. 내부라고 별다를 것은 없었다. 모스크바 톨스토이 기념관과는 정말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었다. 한번 가난뱅이는 영원한 가난뱅이인가?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그가 사용한 서재 겸 집필실이 나타났는데 세 평, 네 평, 뭐 그쯤 되는 규모였다. 책상과 의자, 밀폐형의 크지 않은 서가가 한개, 주홍색 천이 씌워진 3인형 소파 한개,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막혀있어 그 방은 전망 없는 방이었다. 방의 주인은 글을 쓰다 잠시 쉬면서 바깥을 내어다보고 싶어도 사방이 감옥처럼 벽이어서 한숨만 쉬고 주저앉았으리라. 빚 때문에 전망이 있는 방으로 옮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니!

 

그 방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나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두개의 촛대와 수십 장의 빈 원고지들, 그리고 한쪽 켠에 놓여있는 몇 권의 낡은 책들을 한동안 바라보며 기인의 체취라도 느껴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그냥 작가의 궁색한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도스또에프스끼 기념관 밖으로 나와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아주 재미있는 사단이 벌어졌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던 어떤 중년 여성이 갑자기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나와 팔짱을 터억 끼고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다른 동료들은 카메라를 들고 건물도 찍고 동료들 사진도 찍어주느라고 분주했기 때문에 여인이 나와 포즈를 취하는 순간 누군가가 재빨리 다가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그 부근에 거주하는 걸로 생각되는, 밉지 않게 생긴 그 러시아 주부는 한차례 스냅을 찍고 나서 내게 상긋 웃어보이고 자기가 가던 길을 서둘러 걸어갔다. 보면 볼수록 그 사진은 재미있고 드문 장면을 담은 것인데 어느 문학지에서 빌려간 뒤 분실했다면서 돌려주지 않았다. 그 쾌활한 여성은 페테르부르그의 주민들이 인접한 서구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분방한 사고의 소유자들이란 걸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페테르부르그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모스크바로 돌아갈 때는 다시 밤기차를 이용했다. 블라지미르는 기차역 플랫폼까지 나와서 우리를 전송했다. 이미 주위가 깜깜해졌고 일행들이 객차로 먼저 들어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둘렀기 때문에 분위기가 몹시 어수선했다. 대부분 짐들이 많아서 각자 짐을 객차로 옮기느라고 다른 데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젊은 여행 안내자와 품위 있는 작별이 이뤄질 상황이 아니었다. 블라지미르는 혼자 플랫폼에 서서 이미 객차 속으로 사라진 얼굴들을 차창을 통해서나마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내가 그의 옆으로 다가갈 틈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이 청년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며칠간의 성실한 봉사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봐요, 블라지미르. 다음에 내가 이 도시에 왔을 때 그때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오세요. 물론 만날 수 있고말고요. 저는 환영합니다."

 

"그렇지만 내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면 어쩌지요?"

 

"아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나하고 친구가 되는 거요. 지금 이 시간부터. 그렇게 하면 적어도 잊어버릴 걱정은 없겠지."

 

"좋아요. 친구가 되는 건 영광입니다."

 

뜬금없는 언약을 맺고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이 정도로 작별인사는 한 셈이었다. 그러나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 나는 속물적인 나쁜 습관의 유혹을 받았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져 손에 잡히는 지폐를 꺼냈다. 50달러짜리였다.

 

누가 볼까봐 등을 돌리고 서서 나는 그 미화 50달러를 블라지미르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왜 저에게..."

 

"받아둬요. 그냥 떠나기가 서운해서..."

 

"받지 않겠어요. 방금 친구라고 하셨는데 이러시면 안됩니다."

 

블라지미르는 다소 쌀쌀맞게 나를 꾸짖었다. 온건하고 예의바른 말투였으나 사실상 나를 꾸짖은 것이다.

 

50달러라면 당시 내가 소지한 금액에 비추어 적은 돈은 아니다. 이태 뒤에 내가 페테르부르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때 페테르부르그의 일급호텔인 쁘리발티가 호텔 한국식당의 러시아 종업원 월급이 50불이었다. 하긴 뭐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월급도 그 무렵에는 1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비록 속물근성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큰 맘 먹고 지폐를 건넸는데 그만 퇴짜를 맞았다는 얘기다.

 

하는 수 없이 지폐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은 나는 그렇다고 그대로 돌아설 수도 없어서 얼떨결에 내가 여전히 한 손에 굳건하게 들고 있던 라면 열 봉지 꾸러미를 블라지미르에게 내밀었다. 나는 이건 내가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한국 라면이라고 밝혔다. 

 

천만다행히도 블라지미르가 이번에는 선뜻 라면 꾸러미를 받았다.

 

"저도 한국 라면을 좋아합니다."

 

싸늘하게 식을 뻔했던 둘 사이가 금방 복구되었다. 기차가 경적을 울렸기 때문에 나는 블라지미르에게 손을 흔들고 황급히 객차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 밤 기차역에서 어설프게 맺은 친구의 언약은 결과적으로 나보다는 블라지미르 티호노프에게 더욱 큰 의미로 작용하게 된 것 같다. 열흘 동안 줄기차게 들고 다니던 라면 열 봉지가 비로소 제 주인을 찾았다는 것도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때로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남을 크게 돕게 된다. 신이 그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어떤 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나톨리 김은 사람의 만남도 신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내가 가브리노의 그의 다차에 머물 때 그는 내게 종교를 물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이다.

 

내가 종교가 없다고 말하자, 조금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그러면 당신과 내가 이리 만난 게 누구의 조화라고 생각하오?"

 

그 말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내가 라면 열 봉지를 끝까지 들고 다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서로 친구가 되자고 약속한 블라지미르에게 그것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신의 힘이 작용한 게 아닐까. 그게 없이 그냥 50달러 거절로만 끝났다면 서로 기분이 상해서 방금 맺은 '친구' 언약은 없던 일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거절당하는 순간 수치심으로 내 등골이 오싹했으니까.

 

블라지미르가 서울에 나타난 것은 작가 일행의 러시아 여행 이후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다. 그의 서울 출현은 뜻밖이었다. 이른 여름 저녁 나는 그의 전화를 받았는데 처음 페테르부르그에서 걸려온 전화인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