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은 철학과 출신이고 나는 서양언어를 배우는 학교에 다녔는데 중국말은 당연히 한마디도 못한다. 그러나 한문 실력이 출중한 김은 볼펜과 종이만 있으면 중국인과 소통하는 데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김은 물론 어깨에 메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 필기구와 시험지를 잔뜩 가지고 다닌다. 그의 놀라운 필담(筆談) 능력에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돼지사육 농장에 다녀온 뒤 김과 나는 화렌 시내 뒷골목을 지향 없이 어슬렁거렸는데 이 뒷골목 산책은 내 취향이기도 하다. 로마나 빠리나 모스크바나 도쿄나 중심가 대로의 풍경은 서로 닮아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서울의 중심가 풍경도 별 특색 없이 세계의 다른 도시들과 닮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도시나 뒷골목에 가면 자기네 고유한 표정을 읽을 수가 있다.
화렌 시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우리는 어느 수석(水石)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넓은 마당에 기묘한 형태의 수석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분재식물(盆栽植物)을 잔뜩 늘어놓았는데 그 마당에서 바둑판을 중심으로 몇 사람이 바둑 구경을 하고 있었다. 김이 앞서 불쑥 안으로 들어갔고 내가 뒤를 따랐다. 이미 해가 기울어 가스 불을 마당에 여럿 켜놓았는데 우리는 그 불빛의 도움으로 수석과 분재식물을 구경했다.
바둑게임이 끝났을 때 중국 무술고수 같은 복장을 하고 역시 그 비슷한 풍모를 지닌 마흔 안팎의 남자가 우리에게 비로소 말을 걸어왔다. 그가 그 가게 주인장이었다. 김은 재빨리 가방에서 시험지와 볼펜을 꺼내들고 주인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 두 사람은 아마 반시간 가까이 필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김도 오랜만에 적자를 만난 셈이다. 필담을 겨우 끝낸 김이 내게 말했다.
"왕이란 사람인데 화렌 유지급은 되는 것 같습니다. 아는 것도 많고요. 한국과 대만 외교단절 문제로 논쟁을 했는데 그래도 대인배 기질이라 한국 처지를 이해한답니다. 그리고 참, 우리 숙소 가까운 해안에 카페도 운영한다는데 그곳으로 우릴 초대하겠답니다."
"자네 필담 실력이 놀랍군. 나는 한자가 어두워서 한마디도 모르겠던걸."
이 필담 사건으로 나는 후배 작가인 김을 전보다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김은 바다에 별로 감흥을 못 느꼈고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데도 금방 싫증을 냈다. 차를 빌려 타이루거 협곡을 한차례 돌아보고 도장포에 들러 화렌의 유명한 옥돌로 도장 하나씩을 새기고 나자, 김이 화렌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듯 이란으로 가는 기차시간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타이페이의 장숙영이 자기는 주말이 시작되는 내일 이란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나는 화렌에 남은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음날 오후 김과 함께 이란행 기차에 올랐다.
나는 계속 감기 몸살 기운에 시달렸다. 한겨울의 서울에서 갑자기 열대지대로 날아간 후유증이었다. 게다가 타이완 날씨가 변덕스러워 옷을 제대로 갗춰입지 않은 탓에 체온유지에 실패한 것이다. 장숙영은 무리하게 강행군 하는 걸 피해 이란에서도 우리가 하루 묵도록 조처해주었다. 이번에는 기숙사가 아니고 한적한 곳에 있는 아담한 호텔이었다.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황춘밍이 일하는 스투디오 근처로 가서 손님이 없는 허름한 카페 이층에서 황춘밍과 만났다. 황춘밍은 나이가 들었다고 하나 여전히 액션영화 배우처럼 당당한 체구에 잘생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화렌에는 왜?..."
우리가 화렌에 머물다 온다는 얘길 듣고 황춘밍이 대뜸 물었다.
"이 선생님이 그쪽 바다를 좋아하세요."
나를 대신해 장숙영이 대답했다.
"바다라면 그쪽보다 이란(宜蘭)의 해안선이 훨씬 유명하지. 리조트와 좋은 호텔들도 많고. 언제 이란에 한번 와보세요."
이야기는 이 작가의 절대 지지자인 김과 황춘밍 둘이서 주로 했다. 화제작이던 <사요나라 짜이젠>이 대화의 중심 소재였다. 곁에 유능한 통역자가 있기 때문에 김은 이번에는 그 출중한 필담실력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성격이 활달한 이 남국의 동년배 작가에게 나도 좋은 느낌을 받긴 했지만 나는 별로 할 얘깃거리가 없었다. 면담을 대강 끝내고 우리는 황춘밍과 다음을 기약한 뒤 세 사람이 숙소로 돌아왔다.
장숙영은 이란의 자기 친구 집에서 하루를 묵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숙소인 호텔 근처에 왔을 때 장숙영이 내게 와서 말했다.
"몸이 좀 어떠세요? 너무 무리하셨나 보죠."
"머 견딜 만합니다. 지금은 어제보다 조금 나았군요."
"그러시면 호텔 뒷쪽 정원에 작은 연못 하나 있고 벤치도 하나 있던데요. 그곳에 잠깐 나오실 수 있겠어요?"
"그러죠. 김도 함께 나오나요?"
"아뇨."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에게 가서 그 얘길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서울 떠날 때부터 이런 일을 어렴풋이 예상했어요. 예감은 절대 못 속여요."
"나도 예감은 있지만 얘긴 하지 않겠네. 그건 그렇고 자넨 뭘 하고 지내지?"
"마침 아내에게 전화 하려던 참이었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김은 자기 방으로 올라갔고 나는 호텔 정문 근처에서 잠시 머물다가 뒤뜰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