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도 12월, 그때도 서울은 겨울이었다. 속칭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라 정치적으로도 한겨울이었던 셈이다. 일단의 한국 작가들이 타이완 문화부와 관련 단체 초청으로 타이페이를 방문했다. 거창한 세미나 주제를 내걸고 떠난 여행이지만 실상은 싼값으로 품질 좋은 남국여행을 할 수 있다는 유혹에 끌려 합류한 여행이었다. 모두가 그 이전까지 해외여행에 굶주려 있던 시절이다.

 

그때 타이페이 공항에 내리자 말자, 서울의 여름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후끈한 남국의 열기에 온 몸이 되레 떨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공항 밖으로 나가자, 바로 마주친 거대한 야자수 행렬들이 마치 우리를 환영한다는 듯 큰 잎새들을 하늘거리며 도로 양켠에 즐비해 있던 광경들도 떠오른다.

 

아, 내가 남국에 왔구나. 나는 그 기분을 실감했다.

 

이튿날부터 타이페이에서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다. 그때만 해도 대만, 즉 자유중국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로 소소한 이해관계를 초월할 만큼 다정다감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연인으로 치면 한창 뜨겁게 열정이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덕분에 우리는 자국민도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금문도를 관람했고 타이페이에서는 매일저녁 환영만찬이 이어졌다.

 

낮에는 그쪽 문인, 문학관련 학자들과 세미나 시간을 가졌는데 나도 그렇지만 동료들도 이삼일 지나자, 그런 공식행사에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다. 세미나의 주제라는 것이 명분은 그럴 듯하나 개개인에겐 공허하기 이를 데 없어 흥미도 못 느끼고 지루했고 기분도 언짢았다. 염가여행이란 유혹에 끌려 허례 뿐인 국제행사에 도우미로 이용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 작가들은 아예 세미나장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나 금문도를 방문했던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다. 세미나 행사가 대충 끝났을 때 우리는 군에서 제공된 소형 비행기에 탑승하고 금문도로 건너갔다. 그곳 수비사령관이 직접 우리를 마중했다. 그는 그날 저녁 환영만찬도 베풀었다. 금문도 요새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지척에 있는 대륙의 복건성을 바라보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처럼 중국 본토와 왕래가 빈번하던 시기가 아니다. 대륙 땅 해안에서 걸어다니는 주민들 모습까지 선명하게 보여서 우리는 탄성을 터트렸다. 지하에 설치된 대규모 방공 설비들도 군인들이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섬에서 내게 큰 감동을 준 것은 그곳이 대규모 포인세티아의 군락지라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장식물로 우리는 화분에서나 그 화사한 식물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금문도는 섬 자체가 온통 붉고 푸른 포인세티아의 물결로 덮여 있다. 색채도 한국에서 본 것 보다는 훨씬 강렬했다. 나는 포인세티아의 물결에 도취되어 가능하면 그 섬에 며칠이고 더 머물고 싶었다.

 

십일에 걸친 여행일정이 대충 끝나갈 때였다. 당시 인기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H가 내게 다가오더니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형, 낼 모래 일정 끝나면 다들 떠날 건데 그냥 이대로 돌아갈 거야?"

 

여행 떠나면 평소 친하지 않던 사이도 대개 형과 아우가 된다. H는 흥이 나면 소년 같은 치기를 곧 잘 보여주곤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어쩔 건데. 비행기 티켓 날자도 정해 있고."

 

"이건 꼭 형만 알아둬.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되는 거야. 방금 문화대학 여자 교수님이 내게 연락을 했어. 장숙영이라고. 그 교수는 이번 세미나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고. 그쪽 세미나에 나온 인물들이 친정부 쪽 삼류들이라는 거야. 자부심이 대단한 여성이야."

 

"그게 어떻다는 거야? 우리도 삼류가 되는 건가?"

 

"형, 이 H를 믿지?"

 

"그야 뭐..."

 

"장교수가 작가 세 사람 정도가 남게 되면 자기가 화렌 구경도 안내해주고 얘기도 좀 나누고 싶다는 거야. 조금 전 제자를 시켜 나한테 이걸 전해 왔다고. 장교수는 이화여대, 고려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 사정을 우리보다 더 잘 알아. 이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절대 안돼."

 

"흠, 괜찮은 제안이군."

 

"헤헤헤, 형도 이럴 줄 내 알았다고. 절대 비밀이야."

 

우리는 이십여 명이나 되는 다른 동료들에게 순식간에 배반자가 되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처럼 찾아온 남국 나들이인데 알맹이 없는 세미나로 시간을 다 보내고 이대로 떠나기는 정말 너무 억울했다. 그러던 참에 H의 제안, 아니 장교수의 제안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이틀 뒤 동료들이 모두 서울로 돌아간 뒤 나와 H, 그리고 신문사 문학기자로 참여한 P, 세사람은 타이페이의 조용한 찻집에서 그제서야 비로소 얼굴을 내민 문화대학의 여교수와 첫 인사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