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東里선생은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거주했다. 본래 나는 이 분과 별다른 인연이 없는데 집이 가까운 관계로 이분이 자택에서 자주 벌이는 술 파티에 몇 번 불려다녔고 그 이후부터 내막적으로는 조금은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 작단의 거물은 당신의 추종자도 제자도 아닌, 요즘 말로 듣보잡 뜨내기에 지나지 않는 내게 과분한 친절을 베풀었던 것이다.

 

장숙영과 원로작가의 면담은 청담동 작가의 자택에서 쉽게 이루어졌다. 나는 시작부터 면담이 끝날 때까지 동석해서 장교수가 외로움을 타지 않도록 옆에서 분위기를 돋우었고 이야기가 끝날 때 쯤 선생께서 베푸신 정종 두어 잔씩을 기분 좋게 얻어마시고 그 집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에도 장교수의 부탁으로 타이완에서 온 여성비평가 한사람을 東里선생 댁에 데려간 일도 있다. 쉬엔메이던가-이름이 정확하지 않음-하는 이 여성 비평가는 자기 책까지 여러 권 가져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사인을 해서 건네주고 자기 홍보를 했다. 쉬엔메이는 장숙영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었다. 가까운 친구라는데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쉬엔메이는 말수가 많고 무척 활달하며 조금 잘난 척하는 기미도 언뜻언뜻 보였다. 장교수 말에 의하면 타이페이에서 꽤 알려진 여성 비평가라는데 문학에 대한 견해도 장숙영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東里선생은 뒤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쉬엔메이가 장보다는 샤프해. 장은 착하긴 해도 샤프한 맛은 없더구만."

 

나는 이 말에 일면 수긍이 가는 점도 있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이율배반적 생각에 잠겼다. 東里선생은 알다시피 해방 이후 우익 문단을 주도하던 인물이고 군사정권 치하에서도 자기가 누릴 것은 모두 누렸던 인물이다. 극우에 치를 떠는 장숙영의 문학적 견해가 그의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작가 T는 그 무렵에 연희동 노태우 전 대통령 집 인근에서 살았다. 그가 북행하기 얼마 전이니까 노태우 정권시절이 끝나갈 무렵이다. 그를 잘 알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장숙영을 그의 집으로 안내하고 원고청탁이나 번역관계 등, 장교수의 일이 차질 없이 잘 성사되도록 도왔다. 그 후에 일이 잘 진행되어 T가 타이페이 여행을 아주 재미있게 다녀왔노라고 내게 자랑했던 일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앞서 얘기한 작가 김도 장교수의 부탁으로 내가 다리를 놓았고 그의 단편 몇편이 장교수를 통해 중국어로 번역이 되었다. 작가 김으로 말하면 지금은 시대상황이 많이 바뀌고 그의 활약도 주춤하지만 군사정권 말기나 YS 정권 초기 때만 해도 김은 이른바 진보 문학계의 새 가능성으로 높이 평가되곤 했었다.

 

김은 처음 시로 시작했다가 뒤에 소설 쪽에 더 열정을 쏟게 되었는데 그의 작품들을 한 마디로 민중. 저항 등의 말로 단정짓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그가 범 운동권 출신이고 그의 문학 밑바탕이 넓은 의미에서 민중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일면식도 없던 김의 작품이 장숙영의 선택을 받았을 턱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