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서울이 막 겨울로 접어들려고 하던 어느 날 타이페이에서 내게 팩스가 한 장 날아왔다. 그곳 문화대학 교수 장숙영이 보낸 건데 나와 김을 타이페이로 초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메일이 사용되던 때가 아니어서 팩스가 첨단의 통신수단이었다. 며칠 동안 서울과 타이페이 사이에 타이완 여행 문제로 연락이 오고 간 끝에 나와 작가 김 두 사람은 타이페이 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기간은 약 십일이고 초청 측에서 체재기간 동안 숙박과 기타 경비를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타이페이 두 번째 여행을 떠날 때 나는 숙고 끝에 대륙의 상하이에서 번역 발표된 내 작품 자료를 복사해서 장교수에게 보이려고 휴대했다. 공교롭게 그 얼마 전에 상하이에서 번역자가 내 작품 중편 두 편을 문학지에 번역 게재한 사실을 알릴 겸 또 다른 경장편 번역과 출간의 동의를 구하려고 서울에 왔는데 그가 가져온 잡지를 보니 우연찮게도 東里선생 초기작 한 편도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원로급인 번역자에게 작품 정보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김일성 선집 중국어판 감수를 위해 북에 갔다가 거기서 소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잡지 수록 작품 말미에는 북의 비평가의 언급도 간단히 소개되고 있다. 이런 일은 내 상상을 한참 벗어난 일로 나는 지금도 그 일을 해독불가의 일로 여기고 있다.
2009년엔가 우연찮은 기회에 잠시 방북했을 때 묘향산 가는 길에 옆에 앉은 청우당 간부로부터 "북에서 문학을 외부(주로 남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실상을 더 자세히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 점은 중국도 비슷해서 요즘엔 대륙 쪽이 도리어 문학, 예술을 보는 관점이 더 융통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내가 구태여 그런 자료를 장교수에게 가져간 것은 그간 장교수가 가끔씩 "언젠가 선생님 작품도 번역할 거에요."라고 말하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작가 안내를 부탁하고 내게 번거로운 심부름만 시킨 걸 좀 미안하게 생각하고 립서비스 삼아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장교수더러 '이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그걸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봐라, 대륙에서도 이렇게 번역되어 나오지 않느냐?' 이렇게 뻐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그도 거짓일 것이다.
타이완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울서 타이페이까지는 세 시간 남짓 소요된다. 나는 그 정도 시간을 흔히 '담배 두어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비행기 안 객석에 앉아 담배를 피워댄다는 말은 아니다. 요즘에 그랬다간 비행기 창밖으로 쫓겨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후배 작가 김과 처음으로 함께 여행하면서 나는 아주 놀라운 그의 특징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는 한 마디로 내가 아는 한 '이 지상 최고의 애처가'였다.
그는 김포공항에서부터 오 분 간격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시각각으로 자기의 동선과 일정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핸드폰은 특수층만 사용하던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공중전화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는 공중전화를 이용하기 위해 동전 한웅큼을 늘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전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가 동전을 빌려달라고 내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고 나는 여행기간 내내 그의 동전구걸에 시달렸다.
처음에 나는 그의 그런 행동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으나 차츰 익숙해지자, 이 후배 작가를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 친구는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아내 목소리를 오 분 동안만 못 들어도 온통 이 세상이 깜깜해지는 모양이구나.'
물론 타이페이에 가서도 비싼 국제통화료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줄곧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만 국내에서 오분 간격이던 것이 십분 간격 정도로 바뀐 것뿐이었다. 보다 못해 내가 가끔 핀잔을 주어도 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친구를 지켜보며 나는 스스로 자괴감에 빠졌다. 나라는 인간은 남편으로 아버지로 완전 실격이었다. 나는 열흘의 여행기간 동안 한 차례도 집에 통화를 시도하지 않았고 귀국해서 공항 밖으로 나온 다음에 겨우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것도 집이 혹 비어있다면 아파트 현관문 열어줄 사람이 없을까봐 걱정이 되어 걸었던 전화였다.
오후 늦게 비행기가 타이페이 공항에 도착했는데 장교수는 제자 몇 명을 데리고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우리를 태울 승합차가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막상 현지에서 장숙영과 얼굴을 마주치자, 전에 못 느끼던 미묘한 친애감이랄까, 정감을 느꼈다. 장교수도 과거와는 달리 우리를 좀 더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녀는 여름 양복을 입은 나를 보더니 타이페이 날씨가 예상보다 춥다면서 내 뒤로 다가와 내 외투 깃을 세워주기도 했다.
나는 장교수에게 대뜸 말했다.
"화렌 바다를 빨리 보고 싶은데요."
"아이구, 참 성급하시네요. 그러실 줄 알고 타이페이에서 하루만 묵으시고 내일 그리로 가시도록 조처해 놓았어요. 타이페이 일정은 뒤로 미뤘거든요."
우리에게 제공된 타이페이 숙소는 무슨 청년회관의 기숙사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큰 규모의 식당도 있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오전에 고궁박물관과 장개석 사당, 그리고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댐인지 호수인지 그런 것을 둘러보고 오후에 우리는 화렌행 기차에 올랐다. 장숙영은 타이페이에 남았고 화렌에서는 교수의 여자 제자들이 역에서 우리를 맞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둘만 남은 기차의 객석에 앉아 김이 아주 엉뚱한 소리를 했다.
"선생님, 장숙영이 왜 우리를 초대했다 생각하세요?"
"그야 자네 작품도 번역했고 자네 문화대학에서 학생들과 미팅도 잡혀있지 않은가. 나야 뭐 서울에서 조금 도와줬다 해서 끼워준 거겠고."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는데요."
"어떤 각도로 보는데?"
"장숙영이 선생님을 매우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낮에 댐 구경할 때 선생님이 추워하니까 안절부절 못해요. 표정은 속이지 못해요. 저는 사실 이번에 덤으로 따라온 겁니다."
"에끼! 이 친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어. 덤은 자네가 아니고 나야. 장숙영은 민중문학 쪽이 아니면 인정하지도 않는다고.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자네 지루하면 기차에서 국제전화 할 수 있나 알아봐. 음, 저기 전화실이 있군. 빨리 서울로 전화해야지."
김은 깜빡 잊었다는 듯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화 부스가 있는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