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동양고전, 특히 공맹(公孟)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인이다. 최근에는 영상매체를 통한 그 활약이 더욱 두드려져서 공맹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까지 그의 이름, 얼굴과 목소리를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그에 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 그가 국민의 의식을 한 단계 높여준 ‘국민스승’이라고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나르시스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극단의 평가들은 주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엇갈리는 평가들이라 사실 그리 믿을만한 게 못된다. 최근에도 나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의 강의나 강연록을 살펴본 적이 있다. 그는 지식인으로는 드물게 용감한 인물이다.

 

사회 부조리나 부도덕한 정치풍토에 관한 그의 비판은 거칠 것이 없다. 그 용기와 기개는 아주 오래 전 독재자 시절의 함석헌 옹과도 비견될 정도이다. 몇 해 전 금강산에 갔을 때 그 관광을 가능케 만든 어느 기업인의 유덕비에 새겨놓은 그의 글을 봤던 적이 있다. 잘 쓴 미문은 아니지만 분단에 대한 한 지식인의 탄식과 갈망이 그 짧은 글에 녹아나 있었다. 그의 과장된 제스처,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화법 등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나는 사회나 정치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그의 목소리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그 편지묶음을 받아 서울로 돌아온 뒤 십 오륙 년이 흘러갔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그 서신의 주인공을 알기 위해 비닐봉투를 열어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십 오륙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것을 열어보지 않고 고스란히 그대로 보관해왔을 뿐이다. 젊은 시절 열정을 담아 써서 보낸 편지란 그 사람의 심장의 떨림을 기록한 것과도 같다. 적어도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남의 은밀한 심장의 떨림을 혼자 몰래 훔쳐보는 그런 악취미는 갖고 있지 않다. 참지 못할 만큼 호기심이나 궁금증이 발동하지도 않았다. 여기에는 사신도 하나의 인격처럼 그것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도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비닐봉투는 잊혀진 상태로 내 서재의 어느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가끔 서가나 서랍을 정리할 때 그게 눈에 띠었으나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장숙영이 내게 던져준 숙제를 너무 오래 묵혀두고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들었다. 원망의 목소리가 멀리 타이완으로부터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장숙영은 그때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소설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작품으로 만들어보세요. 선생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장숙영은 본래 말수가 적고 말을 극도로 아끼는 사람이다. 대개의 경우 그녀는 씁쓸한 웃음으로 말을 대신해버린다. 편지 묶음을 내게 전할 때도 희미한 웃음만 지을 뿐, 다른 설명 따위는 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장숙영이 연문을 내게 전해준 의도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 번거로운 어떤 일로부터 풀려나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되찾게 된 것도 그 편지에 내가 새삼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게 한편의 소설로 가능할까? 그걸 판단하자면 불가불 그 편지묶음을 열어보는 길 밖에 없다. 나는 십육 년 만에 그 비닐봉투를 뜯고 그 편지들을 열람했다. 반 정도는 한글로 되어있고 반 정도는 영문으로 되어있는 이 서간들은 너무 오래되어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었고 글자들은 퇴색해서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겨우 한 자 한 자 해독이 가능할 정도였다.

 

중국 고전 연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한 젊은 학자와 한국의 문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온 중국의 묘령의 여성, 이 둘의 결합은 개인적 취향을 떠나 일단은 아주 이상적인 구도라고 볼 수 있다. 그 좋은 구도의 그림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쪽이 모국어인 중국어로 도움을 주고 한쪽은 자기나라 현대문학 개요와 한국말의 미묘한 뉘앙스에 관해 세밀한 조언을 해준다면 두 사람의 학업은 날개를 단 마차처럼 날렵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실제로 둘이 사귀던 일정 시간 동안 그런 쌍방의 도움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걸 서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 지탱하지는 못했다.

 

나는 장숙영이 일방적 희생자일 거라고 오랫동안 믿고 있었다. 한국 가정의 엄격한 유교적 가풍에 의해 거부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개방되었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국경을 건너뛰는 결혼은 아주 특이한 사례였다. 이런 경우 누구나 이처럼 상투적으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런데 서신을 열람하고 이 판단이 완전히 바뀌었다. 둘 사이에는 그런 외부의 개입이 없더라도 둘만의 극복하기 쉽지 않은 갈등요인이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는 한 괴짜 청년과 결코 녹록치 않은 타이완의 후진적 환경 속에서 여성 학자로 자기 입지를 다져나가야 하는 젊은 여성 사이에는 둘을 가르는 국경 말고도 극복해야 할 갈등요인들이 거미줄처럼 무수히 개재되어 있다. 목숨을 건 절박함이 편지지의 면면에서 묻어나지만 그럴수록 장애의 벽은 점점 높아진다.

 

이것은 초기의 생각보다 한편의 소설의 자료로는 훨씬 진일보한 내용이다. 만약 <화렌의 연인>을 진정한 픽션으로 작품으로 써야한다면 이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써온 것은 소설 <화렌의 연인>의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는다. 이 프롤로그 이후 이 얘기의 본편을 써야 하는지, 장숙영의 사려 깊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십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결심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재를 바깥에서 얻어오는 소재주의를 그다지 탐탁찮게 생각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 쓴 이 글이 전환점이 되어 가을의 어느 시점이나 혹은 멀지 않아 다가올 어느 계절에 <화렌>의 본편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완성된 그 책을 들고 화렌의 바다를 찾아간다면, 그리고 지금은 은퇴해서 지방도시에서 가족과 함께 지낸다는 장숙영을 만나 그 책을 전하게 된다면 그건 아주 즐거운 세 번째 타이완 여행이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