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의 작가 가운데 황춘밍(黃春明)이란 인물이 있는데 그는 70년대 초반 일본인들의 타이완 엽색관광(獵色觀光)을 신랄하게 고발한 <사요나라 짜이젠>이란 소설로 인기작가로 급부상해서 서울에서도 잠시 화제가 되었었다. 그 작품 말고도 창녀(娼女)의 꿈을 다룬 <항구의 꽃>과 <주머니 칼>이란 작품도 있다. 지금은 다소 먼 얘기가 되었지만 70년대 초라면 서울의 유흥거리에서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일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던 시절이다. 그래서 한국 독자들도 그 소설 주제에 공감이 컸을 것이다.
황춘밍의 이름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은 작가 김이 서울에서 장숙영을 만났을 때 불쑥 그의 근황을 물었기 때문이다. 김은 학창시절에 자신이 황춘밍의 애독자였다고 고백했다. 사회 부조리를 질타하던 한창 때의 운동권 학생으로 밑바닥의 궁핍과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다룬 황의 소설이 ,비록 크게 주목받기 힘든 타이완의 문학이긴 하지만, 김의 눈길을 끌었다는 것은 쉽게 수긍이 된다. 김의 고백을 듣고 장숙영은 반색했다. 그 작가와 매우 친하며 자기도 좋아하는 타이완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란 것이다.
"그분 나이도 꽤 되었을텐데요. 지금도 글을 쓰시나요?"
"생활 때문에 소설에 전념하지 못해요. 이란(宜蘭)이란 곳에서 방송국 일을 하면서 짬짬이 글을 쓰나 봐요. 언제 타이완에 오시면 황선생을 한번 만나보시죠. 제가 주선해드릴 테니."
"좋지요. 저야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그런데 타이완에 언제 가게 될까?"
그때만 해도 김이나 나나 타이완 여행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이페이에 도착했을 때 이번엔 장숙영이 그 얘길 먼저 꺼냈다.
"황춘밍씨에게 김선생 얘길 했더니 아주 좋아라 하며 언제 꼭 만나고 싶답니다. 이번에 만나보시겠어요?"
김이 마치 좋아하는 배우라도 만나게 된 소년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읏으며 기뻐했다.
"깜빡 했는데 잘 되었군요. 저는 언제라도 좋습니다."
장숙영이 나를 돌아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내 생각을 묻는 것이다. 나는 김이 좋다면 나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화렌에서 돌아오실 때 이란(宜蘭)에 잠시 들러 황선생을 만나도록 하지요. 이란이 화렌과 타이페이 딱 중간이거든요. 제가 황선생께 미리 연락을 해놓겠어요."
이것으로 황춘밍과의 만남은 예약이 된 셈이었다.
우리가 화렌역에 도착했을 때 그곳 출신 여학생 두 명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은 휴가기간이라 고향에 와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머물게 된 숙소가 해안가 언덕에 있다는데 아무래도 차를 타고 가야 할 것 같았다. 택시를 잡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검정색 양복을 입은 웬 중년 남자가 다가와서 자기 차로 우리를 모시겠다고 말했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은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저희 아빠에요."
수즙음을 몹시 타는 여학생이 그제야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그 사람 좋아 보이는 학생의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뒤늦게 인사를 나눴다. 부모라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수고라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돼지사육 농장을 운영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그 아버지는 우리 두 사람을 역에서 숙소까지 태워주기 위해 차를 몰고 그곳까지 나온 것이다. 학생들과 아버지는 우리를 해안의 숙소 앞에 내려놓고 내일 오전 돼지농장에 안내하러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곧 농장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숙소는 청년회관 기숙사 같은 곳이었다. 장숙영이 심한 구두쇠란 말을 나는 제자인 진명준으로부터 들었었다.
참, 그 진명준은 학교를 마치고 타이완 외교부에 들어가서 오오사까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이태 전에 들었다. 진명준이 말하길 장숙영은 근검절약이 지나쳐서 절대로 비싼 식당에는 출입하지 않으며 옷도 그럴싸한 싸롱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자기 단골 가게에서 실비로 맞춰 입는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면서 명준은 심하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교수와 함께 다니면서 어찌나 싸구려 음식들만 먹어서 이젠 같이 식사하자는 말을 할까봐 겁부터 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근검하는 장숙영이 우리를 초대했으니 이건 예삿일은 아니다. 장교수가 호텔 숙박 대신 타이페이나 화렌에서 청년회관 기숙사를 우리 숙소로 미리 정해놓은 걸 보면 아마 이런 곳은 국제교류라는 명분을 붙여 거의 공짜로 이용이 가능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고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숙소에서 배정받은 3층의 방으로 들어가서 창문을 열어젖히자, 거짓말처럼 화렌의 그 바다가 손에 잡힐듯 지척에 펼쳐져 있다. 몇 해만에 다시 보게 된 화렌의 바다인가? 매년 겨울이 올 때마다 나는 이 따뜻한 바다를 떠올렸었다. 마치 안식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가슴이 후련했다. 이번만은 호텔이 아닌 곳에 숙소를 잡아준 장교수가 되레 고마왔다. 각자의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김과 나는 근처 마을 식당에서 완탕이라는 중국식 만두국으로 가벼운 저녁을 들고 늦게까지 해안을 거닐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오전에 어제의 그 아버지와 학생 둘이 차를 가지고 어김없이 나타났다. 돼지사육 농장은 시내에서 차로 반시간 가량 걸리는 교외 한적한 지대에 있었는데 규모가 엄청나게 큰 데 놀랐다. 끝없이 늘어선 축사를 바라보며 돼지를 몇 마리나 키우느냐고 학생에게 물었더니 얼굴이 발개지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기만 했다. 그 학생도 자기네 농장에서 키우는 돼지 숫자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중국인들은 돼지고기 소비가 많아서 화렌만 해도 인근에 비슷한 규모의 사육농장이 몇 개 더 있다고 그 아버지가 알려주었다. 사육농장을 대충 한 바퀴 둘러본 뒤 우리는 푸짐한 점심대접을 받았는데 돼지사육농장에서 베푸는 점심 식단에 돼지고기는 나오지 않았다. 주로 생선요리와 야채요리가 식탁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