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나는 화렌을 떠올린다. 형편이 허락한다면 남국 따뜻한 바닷가 소도시에서 이 겨울을 보낼 수는 없는가 하고.

 

나이 들수록 아파트 옆 모퉁이에서 불어오는 겨울 찬 바람이 살갗에 칼날처럼 아프게 느껴진다. 겨울 한동안은 타이완 동부 해안도시 화렌에서 어슬렁거리며 지내다가 봄이 되면 서울로 돌아온다. 왜 하필 화렌인가? 나는 화렌의 바다에 잔뜩 매료되어 있다. 그곳 해안 언덕에 서서 남태평양의 코발트 색깔의 푸르른 물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갖 시름이 스르르 사라지고 아늑한 꿈결 속에 숨을 쉬고 있는 듯한 평온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런 사치를 한 번도 실현해 본 적은 없다. 지난 겨울에도 화렌의 푸른 물결을 떠올렸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겨울로 들어선지 한 달쯤 되었을까. 늦은 첫 눈이 푸석푸석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은 무턱대고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타이페이에서 온 장숙영이 창 밖에서 내리고 있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지금 저 눈이 서울에서 제가 보는 마지막 눈이 될 거에요."

 

김과 나는 처음 그 말을 무심결에 흘려들었다. 그날은 김과 내가 내일 떠나는 장교수를 위해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였다. 강남의 조그만 일식집 한적한 방에 자리를 잡고 뜨거운 국물이 있는 요리를 시켜놓고 기다리는 참이었다.

 

장교수는 타이페이 소재 문화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데 부지런한 그녀는 이번 겨울에도 자료수집과 관련 학계의 인사 면담 등을 위해 서울에 왔고 이제 그 일정이 대충 끝나 내일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교수님. 방금 마지막 눈이라고 하셨죠? 그게 무슨 뜻이죠?"

 

평소 반응이 굼뜬 김이 뒤늦게 물었다. 김은 사십대의 촉망받는 작가로 문학계간지와 출판사를 직접 운영하며 사업가 기질도 보여주고 있다. 장교수는 김의 단편 두어편을 중국어로 번역했는데 내가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줬기 때문에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질문을 받은 장교수는 망설이지도 않고 분명하게 말했다.

 

"아, 저 이제 다시 한국에는 오지 않을 거에요. 이번이 마지막 서울여행이랍니다."

 

평소에도 장숙영의 표정은 차가운 편이고 좀처럼 헤픈 웃음 따위를 보이지 않는, 조금은 냉정한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표정은 유독 싸늘했다.

 

'이번 여행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고 있었을까?' 나는 그녀의 단호한 표현에 속으로 놀라며 장교수의 선이 고운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중국여성이지만 참하고 고즈넉한 여성다움을 지닌 장숙영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다.

 

김과 내가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이런 때 꼬치꼬치 사연을 캐물을 수도 없는 곤혹스런 기분을 둘이 서로 교환한 것이다.

 

즐거워야 할 그 식사 자리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그리고 장숙영은 자기 말 대로라면 마지막 한국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예정대로 타이페이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