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꿈을 꾸었다.
아마도 아주 오랜 옛날, 오히려 신화 시대에 더 가까운 태고적 이야기 같다. 나는 전쟁에서 운 나쁘게 패배해서, 포로가 되어 적장 앞에 끌려나가 있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모두 키가 컸다. 그리고 모두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가죽 허리띠를 매고, 그 허리띠에 막대기 같은 칼을 차고 있었다. 활은 굵은 등나무 줄기를 그대로 쓴 것 같았다. 옻칠도 하지 않았고 반드르르하게 광을 내지도 않았다.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적장은 활의 한가운데를 오른손에 쥐고, 그 활을 풀 위에 꽂았다. 그리고는 엎어 놓은 술독 같은 것에 걸터앉아 있었다. 적장의 얼굴은, 코 위로 굵은 두 눈썹이 이어져 있다. 그 무렵에는 면도기 따위는 물론 없었다.
나는 포로였기 때문에 걸터앉을 수가 없다. 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발에는 커다란 짚신을 신고 있었다. 이 시대의 짚신은 목이 높았다. 일어서면 무릎까지 닿았다. 끝부분은 짚을 다 여미지 않고 조금 풀어 헤쳐서 술처럼 늘어뜨리고, 걸을 때 너울거리도록 해서 장식으로 삼고 있었다.
대장은 화톳불 빛으로 내 얼굴을 보더니 "죽겠느냐 살겠느냐?" 하고 물었다. 이것은 그 당시의 관습으로, 포로라면 누구에게나 일단 그렇게 묻는 것이다. 살겠다고 대답하면 항복한다는 뜻이고, 죽겠다고 말하면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 된다. 나는 한마디, 죽겠다고 대답했다. 대장은 풀 위에 꽂아 두었던 활을 저쪽으로 내던지더니, 허리에 찬 막대기 같은 칼을 휙 뽑으려 했다.
그때, 바람에 쓸린 화톳불이 태울 듯이 옆으로 다가들었다. 나는 오른손을 단풍잎처럼 벌리고 손바닥을 적장을 향해 눈 위로 쳐들었다. 잠깐 기다리라는 신호다. 적장은 철컹 소리를 내며 굵은 칼을 칼집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 무렵에도 사랑은 존재했다. 나는 죽기 전에 한 번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적장은 날이 새고 첫닭이 울 때까지만 기다리겠노라고 말했다. 첫닭이 울 때까지 여자를 이곳으로 불러오지 않으면 안 된다. 첫닭이 울어도 여자가 오지 않으면 나는 만나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대장은 걸터앉은 채, 화톳불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커다란 짚신을 신고 발을 가부좌로 꼰 채, 풀 위에 앉아 여자를 기다린다. 밤은 점점 깊어 간다.
가끔씩 화톳불이 사그러드는 소리가 난다. 사그러들 때마다 불꽃이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듯 적장 쪽으로 쏠린다. 적장의 눈이 새카만 눈썹 아래에서 빛난다. 그러면 누군가 와서 새 나무토막을 불 속에 던져넣고 간다. 그리고 나면 얼마 뒤 불꽃이 튀는 소리가 난다. 어둠을 밀어 낼 듯이 기운찬 소리다.
이때 여자는, 뒤뜰 졸참나무에 매어 놓은 백마를 끌어 냈다. 갈기를 서너 번 툭툭 쓰다듬고는 높다란 등에 제비처럼 가볍게 뛰어 올라탔다. 안장도 등자도 없는 말이다. 길고 흰 다리로 옆구리를 걷어차자, 말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화톳불을 더 올려서, 먼데 하늘이 어렴풋이 밝아 보인다.
말은 이 밝은 곳을 향해 어둠 속을 날아온다. 코에서 불기둥 같은 두 줄기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온다. 그래도 여자는 가느다란 다리로 쉴 새 없이 말 옆구리를 걷어차고 있다. 말은 허공에 말발굽소리가 울릴 정도로 질풍같이 달린다. 여자의 머리칼은 어둠 속에서 바람에 나부껴 깃발처럼 뒤로 흩날린다. 그래도 아직 화톳불 있는 곳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때 캄캄한 길가에서 홀연히 꼬끼오 하는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몸을 하늘 쪽으로 젖히며, 두 손에 쥔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다. 말은 앞 발굽을 단단한 바위에 콱 찍어 박았다.
꼬끼오 하고 닭이 또 한 번 울었다.
여자는 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잡아당겼던 고삐를 갑자기 늦췄다. 말은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그리고 타고 있던 사람과 함께 곧장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바위 밑은 깊은 골짜기였다.
말발굽 자국은 아직도 바위 위에 남아 있다. 닭 우는 흉내를 낸 것은 심술궂은 마귀다. 이 말발굽 자국이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한, 마귀는 나의 원수인 것이다.
열흘 밤의 꿈 - 다섯째 밤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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