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꿈을 꾸었다.

주지승의 방을 물러나와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돌아오자, 등잔불이 희미하게 켜져 있다. 방석에 한쪽 무릎을 대고 심지를 돋우자, 꽃봉오리 같은 등잔 기름이 붉게 칠한 받침대 위에 뚝 떨어졌다. 동시에 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장지문의 그림은 부송(蕪村, 에도시대의 시인이자 화가)이 그린 것이다. 검은 버드나무가 짙고 흐리게, 또 멀고 가깝게 그려져 있고, 추워 보이는 어부가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서 제방 위를 걸어가고 있다. 도꼬노마(방의 상석에 바닥을 한 단 높게 만들어 족자나 꽃을 장식하는 곳)에는 해중문수(海中文殊,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시종을 거느린 채 구름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불교화) 족자가 걸려 있다. 어두운 구석에는 타다 남은 향냄새가 아직도 풍기고 있다. 넓은 절간이 온통 고요하기만 하고 인기척이 없다. 검은 천장에 비치는 등잔불의 둥근 그림자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릎을 세운 채, 왼손으로 방석을 들추고 오른손을 넣어 보니, 생각한 그 자리에 제대로 있었다. 안심하고, 방석을 원래대로 해 놓고 그 위에 털썩 앉았다.

"너는 사무라이다. 사무라이라면 해탈하지 못할 리 없을 테지" 하고 주지승이 말했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깨치지 못하는 걸 보면 사무라이가 아닌 게로구나" 하고 말했다. 인간 쓰레기라고 말했다. "응, 화가 났군" 하며 웃었다. "분하면 해탈한 증거를 갖고 오라"며 고개를 획 돌리며 돌아앉았다. 괘씸한 땡초 같으니.

커다란 옆방에 놓여 있는 시계가 다음 시각을 알릴 때까지는, 반드시 해탈해서 보여주마. 해탈한 다음, 오늘밤 또 입실(주지승한테 가서 선에 관한 문답을 하거나 질문을 하는 것)해야겠다. 그리고 주지승의 목과 해탈을 맞바꿔 주겠다. 해탈을 못 하면 주지승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해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사무라이란 말이다.

만약 해탈하지 못하면 내 손으로 목숨을 끊겠다. 사무라이가 치욕을 당하고 살아 있을 수는 없다. 깨끗이 죽어 버리겠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내 손은 또 나도 모르게 방석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붉은 칼집에 든 단도를 끄집어 냈다. 칼자루를 꼭 쥐고 붉은 칼집을 저쪽으로 밀어내자, 차가운 칼날 빛이 어두운 방안을 가르며 빛났다. 참담한 무언가가 손끝을 통해 슬슬 빠져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빠져나가서는 모조리 칼 끝의 한 지점에 모여 살기를 가두어 놓고 있다. 나는 이 날카로운 칼날이 내 의지와 달리 바늘끝만큼 줄어들어서 한 자 길이 맨끝에서 하릴없이 뾰족해져 있는 것을 보며, 당장에라도 푹 찔러보고 싶어졌다. 온몸의 피가 오른손 팔목으로 흘러들어와, 쥐고 있는 칼자루가 끈적끈적하다. 입술이 떨렸다.

단도를 칼집에 다시 꽂고 오른쪽 옆에 쪽에 가까이 놓은 뒤, 똑바로 좌선의 자세를 취했다. 조주 선사가 무(無)라고 했다. '없다(無)'는 말이지. 도대체 뭐가 없다는 말이냐. 땡땡이 중놈 같으니, 하고 이를 갈았다.

어금니를 너무 악물었더니 코에서 더운 김이 거칠게 뿜어나온다. 관자놀이가 땅기며 아프다. 눈은 보통 때보다 두 배나 크게 뜨고 버텼다.

족자가 보인다. 등잔불이 보인다. 다다미가 보인다. 주지승의 벗겨진 대가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커다란 입을 찢어져라 옆으로 벌리고 조롱하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고약한 중놈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모가지를 잘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해탈하고야 말 테다. "무다, 무..." 하고 혀끝으로 되풀이 외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 여전히 향냄새가 난다. 에끼 이놈의 냄새!

나는 별안간 주먹을 쥐고 내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그리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양쪽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른다. 등이 막대기처럼 뻣뻣하다. 무릎 관절이 갑자기 아파온다. 무릎이 부서진들 무슨 대수랴 싶었다. 하지만 아프다. 고통스럽다. 무는 좀처럼 찾아와주지 않는다. 온다고 생각하면 금방 아파진다. 화가 난다. 가슴이 무너진다. 너무 분하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차라리 몸을 바위에 단숨에 부딪쳐, 뼈도 살도 박살을 내고 싶어진다.

그래도 꾹 참으며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참을 수 없으리만치 간절한 무언가를 가슴속에 담은 채 견디고 있었다. 그 간절한 것이 온몸의 근육을 밑에서부터 밀면서 땀구멍을 통해 밖으로 밖으로 빠져나오려 안달이다. 하지만 어디고 다 완전히 막혀 마치 출구가 없는 듯한, 완전히 참담한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에 머리가 멍해졌다. 등잔도 부송의 그림도 다다미도 선반도,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는 전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망연히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별안간 옆방 시계가 땡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번쩍 제 정신이 들었다. 오른손을 잽싸게 단도에 갖다 댔다. 시계가 두 번째 종을 땡 하고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