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꿈을 꾸었다.
팔장을 끼고 베갯머리에 앉아 있노라니, 똑바로 누워있던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이제 죽어요" 하고 말한다.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베개 위에 깔고, 윤곽이 부드러운 갸름한 얼굴을 그 안에 누이고 있다. 하얀 뺨 밑으로 따스한 혈색이 적당히 비쳐 보이고, 입술 빛깔은 빨갛다. 아무리 봐도 죽을 사람 같지는 않다. 하지만 여자는 조용한 소리로 "이제 죽어요" 하고 분명히 말했다. 나도 '이젠 분명히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래, 벌써 죽는 거야?" 하고 위에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물어보았다. "죽고말구요" 하고 여자는 말하면서 눈을 번쩍 크게 떴다. 커다랗고 젖은 눈이었다. 긴 속눈썹으로 싸인 그 눈 속은 온통 새까맸다. 그 새까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 내 모습이 뚜렷이 떠 있다.
나는 투명하리만치 깊어 보이는 그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런데도 죽는 걸까 싶었다. 그래서 다정하게 베개 옆으로 입을 가까이 갖다 대고 "죽지는 않겠지? 괜찮은 거지?" 하고 안타깝게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졸린 듯 검은 눈을 크게 뜬 채,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그래도 죽는걸요, 어쩔 수 없어요" 하고 말했다.
"그럼, 내 얼굴이 보여?" 하고 다급하게 묻자, "보이냐구요? 보세요, 거기 비치고 있잖아요." 하며 생긋 웃어 보였다. 나는 잠자코 머리맡에서 얼굴을 떼었다. 팔장을 끼며 '꼭 죽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잠시 후에 여자가 또 이렇게 말했다.
"죽거들랑 묻어 주세요. 커다란 진주조개로 구덩이를 파구요.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별 조각을 무덤의 표지로 놓으세요. 그리고 무덤 옆에서 기다려 주세요. 또 만나러 올 테니까요."
나는 언제 만나러 오느냐고 물었다.
"해가 뜨지요, 그리고 해가 지지요. 그리고 또 뜨지요, 그러고는 또 지지요... 붉은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가는 동안, ... 당신, 기다릴 수 있겠어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조용한 목소리를 높이더니,
"백 년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백 년만 내 무덤 옆에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꼭 만나러 올 테니까요."
나는 그저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말했다. 검은 눈동자 속에 또렷이 보였던 내 모습이 부옇게 흐려져기 시작했다. 잔잔한 물에 파문이 일어 물 위에 비치던 그림자를 흐트러뜨리듯, 물이 흘러내리는가 했더니 여자의 눈이 깜박 감겼다. 긴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뺨을 흘러내렸다. 여자는 어느 새 죽어 있었다.
나는 정원으로 내려가, 진주조개로 구멍을 팠다. 진주조개는 커다랗고 모서리가 날카롭고 반들반들하게 닳은 조개였다. 흙을 파헤칠 때마다, 조개 껍질에 달빛이 비쳐 반짝거렸다. 축축한 흙 냄새도 났다. 얼마 동안 파내자 구멍이 생겼다. 여자를 그 안에 눕혔다. 그리고 부드러운 흙을 위에서 사르르 뿌렸다. 흙을 뿌릴 때마다 진주조개 껍질 뒤에 달빛이 비쳤다.
그리고 떨어진 별 조각을 주워 와, 흙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별 조각은 동그랬다. 오랫동안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안 모서리가 닳아 반들반들해진 것 같았다. 가슴에 안아올려 흙 위에 놓는 동안, 내 가슴과 손이 조금 따뜻해졌다.
나는 이끼 위에 앉았다. 이제부터 백 년 동안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팔장을 낀 채 둥근 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여자가 말한 대로 해가 동쪽에서 솟아올랐다. 커다랗고 붉은 해였다. 그리고 또 여자가 말한 대로 얼마 후 서쪽으로 떨어져 갔다. 붉은 빛깔 그대로 휙 떨어져 갔다. "하나" 하고 나는 세었다.
얼마 후 다시 붉은 해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리고 잠잠히 서쪽으로 떨어져 버렸다. "둘" 하고 또 세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어 가는 동안, 나는 붉은 해를 몇 개나 봤는지 모른다. 세어도 세어도 다 셀 수 없을 만큼 붉은 해가 머리 위를 건너 지나갔다. 그래도 아직 백 년은 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끼가 낀 둥근 돌을 바라보며, 나는 여자한테 속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돌 밑에서 내 쪽을 향해 비스듬히 파란 줄기가 뻗어왔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자라더니, 바로 가슴 언저리까지 와서 멈췄다. 그리고 길게 뻗어 늘씬하게 흔들리는 줄기 끝에서 갸웃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늘고 긴 한 송이 꽃봉오리가 방긋이 꽃잎을 열었다. 새하얀 백합이 코끝에서, 뼈 속에 스며들 만큼 진한 향기를 풍겼다. 그때 아득히 먼 위에서 툭 하고 이슬 방울이 떨어져, 꽃은 그 무게에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차가운 이슬이 맺힌 하얀 꽃잎에 입을 맞추었다. 백합꽃에서 얼굴을 떼면서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니, 새벽 별이 단 하나 깜박이고 있었다.
'벌써 백 년이 된 거였구나.'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