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무렇게나 휘파람을 불면서 나가 버렸다. 하지만 시내에 있는 공장에 도착하자 문득 이 문제가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그도 쏘렌트씨에서 묶었던 그 집에서 최근 자살 사건이 벌어진 것은 알고 있었다. 또 요즘 아내가 그의 시집을 들고 있었던 것, 그들이 쏘렌트씨에서 머물 때 집주인이 트리위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을 얼핏 들었던 기억도 났다. 그는 갑자기 중얼거렸다. "그래, 바로 그 녀석일 거야! 대체 엘라는 그 녀석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을까? 이러니 여자란 정말 교활한 것들이란 말이야!"

그는 그 문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다시 차분히 일에 몰두했다. 그 무렵 집에 있던 엘라는 어떤 결심을 했다. 후퍼 부인이 머리카락과 사진을 보내면서 장례식 날짜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점심 무렵이 되자 트리위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고인을 사모하는 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제 그녀는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서는 거의 개의치 않았다. 엘라는 남편 앞으로 그날 오후와 저녁은 집을 비우고 내일 아침에 돌아오겠다는 간단한 쪽지를 써서 책상 위에 남겨 놓았다. 그녀는 하인들에게도 그렇게 이르고는 걸어서 집을 나섰다.

마치밀이 오후 일찍 집으로 돌아오자 하인들이 어딘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모가 가만히 그에게 찾아와 지난 며칠 동안 부인의 태도로 봐서는 너무 슬퍼하는 바람에 혹시 투신자살이라도 하는 것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마치밀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내가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어디 간다고 밝히지 않고, 자기를 밤새 기다리지는 말라고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 그는 마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달려가 쏘렌트씨 행 기차표를 샀다.

그는 급행을 탔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캄캄했다. 아내가 먼저 떠났다고 해도 그 시간에는 완행열차밖에 없으므로 자기보다 별로 빨리 도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쏘렌트씨는 이제 시즌이 지나서 길거리가 몹시 쓸쓸했다. 지나다니는 마차도 드물고 요금도 많이 떨어졌다.

그는 묘지로 가는 길을 물어 곧 그곳에 도착했다. 입구의 문은 당혀 있었다. 묘지 관리인은 안에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도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건만 주위에는 벌써 가을의 저녁 빛이 덮여 있었다. 그는 관리인의 설명을 듣고 그날 매장한 묘지들이 있는 곳을 향해 꾸불꾸불한 길을 더듬어 갔다.

그는 풀뿌리에 채이고 말뚝에 걸리기도 하면서 가끔 몸을 구부려 어디 사람의 모양이 보이지 않나 여기저기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나타났다. 거기 새로 묻은 무덤 곁에 어떤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라는 그의 발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 이게 무슨 바보같은 짓이오?" 그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멋대로 집을 뛰쳐나오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그렇다고 이 가엾은 친구를 질투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결혼을 해서 애들이 셋씩이나 있고, 게다가 곧 넷째가 태어날 당신 같은 여자가 죽은 옛 애인에게 정신을 잃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요! 묘지 문이 닫혔다는 건 알고 있었소? 밤새도록 여기서 못 나갈 뻔하지 않았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 사람과 깊은 관계까지 간 건 아니겠지?"

"절 모욕하지 마세요, 윌."

"명심해요. 난 이런 일은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 없소. 알겠소?"

"알았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마치밀은 아내의 팔을 잡고 묘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또 이런 비참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기차역 근처의 허름한 찻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그곳을 떠났다. 말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결혼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고통의 하나라는 생각에서 그들은 기차 안에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정오쯤 그들은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서 여러 달이 지나갔다. 부부 중 어느쪽도 이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엘라는 종종 서글픈 듯한, 무기력한 심정에 사로잡혀 차분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어딘지 앓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에게 네 번째 해산의 고통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도 그녀에게 기운을 차리게 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무사할 것 같지 않아요." 어느 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지금까지도 잘해 왔는데, 이번이라고 다를 게 뭐란 말이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전 꼭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아이들... 넬리와 프랭크, 티니만 아니라면 차라리 그러는 편이 기쁠 것 같아요."

"나도 있지 않소?"

"당신이야 금방 저를 대신할 사람을 찾으실 거예요." 그녀는 쓸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말 당신은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엘, 당신 아직도 그... 시인이라는 친구를 못 잊고 있는 것 아니오?"

그녀는 남편의 이런 추궁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제대로 치러내지 못할 것 같아요." 그녀는 되풀이했다. "예감이랄까요? 틀림없이 그럴 것 같아요."

흔히 그렇듯 이런 예감은 불길한 일의 징조가 되는 법이다. 6주일이 지난 오월 어느 날, 그녀는 맥박이 약하고 핏기가 사라진 채 희미하게 숨쉬는 것조차 힘겨워 하며 자리에 누워 있었다. 태어난 아기는 건강하고 살이 통통하게 쪘다. 하지만 별로 필요하지 않은 그 생명을 낳기 위해 그녀의 생명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남편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윌, 당신에게 그 일... 당신도 아시죠? 우리가 쏘렌트씨에 갔을 때의 일을 남김없이 말하고 싶어요. 내가 무엇에 사로잡혔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당신, 남편인 당신을 그렇게 까맣게 잊을 수 있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제가 좀 어떻게 됐나 봐요. 당신이 다정하게 해주지 않고, 저를 무시하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은 저보다 훨씬 뛰어난데, 당신은 제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생각했어요. 전 다른 애인이 필요했다기보다 좀더 저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원했던 것 같아요..."

그녀는 기진맥진해서 더 이상 남편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시인과의 연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밝히지 못하고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윌리엄 마치밀은 결혼한 지 여러 해 지난 남편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지난 일을 질투해서 새삼스럽게 심란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려서 자기에게 아무런 해로울 것도 없는 사내와 있었던 일을 고백하라고 아내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죽고 이 년이 지난 후 재혼할 여인을 집에 맞아들이기 전에 정리할 생각으로 잊고 있었던 서류들을 뒤적이다가 마치밀은 우연히 봉투 속에서 죽은 시인의 사진과 함께 한 줌의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사진 뒤에는 죽은 아내의 글씨로 날짜가 적혀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쏘렌트씨에서 여름을 보내던 시기였다.

마치밀은 뭔가 마음에 지피는 게 있어 가만히 그 머리카락과 사진을 지켜보며 생각을 추스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죽게 만든 막내 아이를 데리고 와 무릎에 올려놓았다. 아이는 벌써 아장거리며 걷고 수선을 떠는 나이였다. 마치밀은 시인의 머리카락과 아이의 머리카락, 사진의 얼굴과 아이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비교했다.

설명하기 곤란한 자연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그 아이의 모습에는 엘라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그 남자와 닮은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꿈꾸는 듯한 시인의 독특한 표정이 마치 그 생각을 물려받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의 표정에 서려 있었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같은 색깔이었다.

"과연 짐작했던 대로군..." 마치밀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놈하고 하숙집에서 놀아난 거였어! 어디 보자! 피서를 간 것이 8월 둘째 주고... 이 자식이 태어난 것이 5월 셋째 주니... 틀림없어, 에이, 빌어먹을... 저리 가! 이 자식아! 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놈이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