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부드럽고, 착한 분이신 모양이군요?"
"그렇구 말구요. 제가 부탁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답니다. 가끔 제가 '트리위씨, 어쩐지 기운이 없으신 것 같군요' 이러면 그분은 '정말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후퍼 부인?'하고 대답한답니다. 그러면 저는 그분에게 권하지요. '기분 전환으로 여행이라도 하시면 어때요?' 그럼 그분은 하루나 이틀 뒤에 파리나 노르웨이 또는 그 밖의 어디론가 여행을 가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쯤이면 완전히 기운을 회복해서 생기가 넘쳐흐르지요."
"그래요? 그분은 정말 예민한 분인 모양이에요."
"그렇지요. 하긴 좀 색다른 점도 있긴 하지만요. 언젠가 한 번은 밤이 깊어서 시 한 편을 다 쓰신 모양이에요. 그런데 밤새 그걸 낭송하면서 방안을 걸어 다니는 바람에... 이런 얘긴 뭣하지만 사실 저희 집 마룻바닥이 좀 얇거든요... 말씀드렸지만 급하게 지은 집이라서요. 그래서 저는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결국 그분께 잠 좀 자게 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답니다... 그래도 그분과는 아주 사이좋게 지낸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들은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신예 시인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트리위가 화제에 올랐을 때 후퍼 부인은 그 때까지 엘라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침대머리를 가린 커튼 뒤의 벽지에 연필로 작게 끄적거린 글씨였다.
"어머나, 좀 보여주세요." 마치밀 부인은 허리를 굽혀 아름다운 얼굴을 벽 가까이 갖다댔다. 솔직히 애정 어린 호기심이 솟아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바로 그분 시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어요." 후퍼 부인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처음 생각나는 착상을 이렇게 적은 거예요. 대부분 지워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읽을 수 있지요. 아마 한밤중에 시 구절이 떠오르면 잠에서 깨어 아침이면 잊어버릴까봐 벽지에 적어둔 것이겠지요. 여기 씌여진 것이 나중에 그대로 잡지에 실린 것을 본 적도 있답니다. 아주 최근에 새로 쓴 것도 있는 것 같더군요. 자, 이거 보세요. 이건 저도 보지 못한 건데요... 바로 며칠 전에 써둔 모양이지요."
"정말, 그렇군요!"
엘라 마치밀은 이유도 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문득 이제 집주인이 나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주인에게서 듣고 싶은 것을 다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문학적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뭐라고 형언하기 곤란한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그 글을 혼자 읽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 혼자서 그걸 읽으면 그 감흥도 훨씬 더하리라. 그녀는 그 즐거움을 기대하며 혼자 될 때를 기다렸다.
섬 밖으로 나가면 파도가 거칠었다. 엘라의 남편은 배를 타는 데 별로 익숙치 않은 아내와 함께 나가기보다 혼자서 배를 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울 거라 생각했다. 그는 관광용 기선에 혼자 타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달빛 아래에서 남녀가 춤을 추기도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배가 기울면 마치 이것이 기회라는 듯 서로 껴안기도 한다.
사실 그가 아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준 것처럼 그 배에는 점잖지 못하고 야비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별로 아내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잘 나가는 이 사업가가 이렇게 숙소를 떠나 마음껏 바다 바람을 쏘이며 기분을 전환하는 동안, 엘라의 생활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단조로웠다. 기껏해야 하루에 몇 시간 해수욕을 하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시적인 충동이 다시 강하게 솟구쳐 그녀는 열정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래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거의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녀는 최근에 나온 트리위의 작은 시집을 거의 다 외울 정도로 거듭해 읽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시에 필적할만한 작품을 한 번 써보려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도저히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그 스승에게는 자석과 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매력은 지적이고 추상적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요소가 훨씬 더 강했다. 그녀도 이러한 사실이 의아스러웠다.
그녀가 밤이나 낮이나 둘러싸여 있는 그 환경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늘 그녀에게 그의 존재에 대해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존재는 그녀가 아직 한 번도 얼굴조차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뭔가 자신의 벅찬 감정을 배출할 수 있는 적절한 대상을 찾고 있었고, 그 사람은 그녀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첫째 대상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엘라 자신은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혼이라는 것은 문명이 그 열매를 맺기 위해 고안해낸 환경이다. 그러한 무미건조한 조건에서 나온 애정이 으레 그렇듯이 엘라에 대한 남편의 사랑도 가끔 변덕을 피우는 우정 정도였다. 사실 엘라가 남편에게 품고 있는 사랑도 이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그보다 훨씬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슴속에 열정을 품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어떤 마음을 붙일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운명에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아이들이 벽장에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너무 신이 나서 그 안의 옷을 끄집어냈다. 후퍼 부인은 그것은 트리위 씨의 것이라고 말하고 다시 벽장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여느 때처럼 호기심에 사로잡힌 엘라는 그날 오후 늦게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벽장문을 열고 거기 걸려 있는 레인코트를 꺼내 입어 보았다.
'엘리야(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그의 제자 엘리사가 스승의 겉옷을 통해 권능을 이어받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 편집자 주*)의 외투여!'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것을 입은 나에게도 영감이 솟아올라 저 기막힌 천재와 한 번 겨룰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생각에 잠길 때면 그녀는 언제나 눈물에 젖어 시야가 흐려지곤 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거기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이 이 외투 속에서 고동치고, 그의 두뇌가 이 모자 밑에서 그녀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고상한 사색을 펼쳤으리라. 그와 비교해보면 그녀는 자신의 재능이 빈약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옷을 채 벗어놓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남편이 들어왔다.
"그게 도대체 뭐하는 거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외투를 벗었다.
"이 벽장 속에 걸려 있더군요. 그래서 장난 삼아 입어 본 거예요. 도대체 할 일이 없는 걸요. 이런 장난이라도 해야지, 너무 심심해요. 당신은 늘 밖에 나가 있으니까요."
"늘 밖에 나가 있다고? 흠, 그래...?"
환상을 좇는 여인 - 3. 가슴속에 숨어있던 열정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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