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자기가 보낸 편지가 남자가 쓴 것 치고는 아무래도 어딘지 좀 여리고 소심한 내용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트리위는 답장에서 어딘지 선배 또는 연장자 같은 말투를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무튼 그가 답장을 보내 오지 않았는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방에서 그의 손으로 직접 써 보낸 편지이지 않은가? 그는 지금쯤 그 집에 다시 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편지 왕래는 두 달 가량 이어졌다. 엘라 마치밀은 가끔 자기가 쓴 시 가운데서 가장 자신있는 작품을 몇 편 골라서 트리위에게 보내곤 했다. 그는 답장에 잘 받아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다지 정성들여 읽은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자기 시를 답장에 함께 보내오지도 않았다. 트리위는 그녀가 남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그녀의 상처는 아마 훨씬 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태로는 그녀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한 번만이라도 본다면... 상황은 아마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유혹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났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그에게 솔직하게 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와 만날 기회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연한 일이 생겨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 지방에서 가장 유력한 신문의 편집장이 어느 날 저녁 그들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남편의 친구였다. 이 자리에서 우연히 이 시인이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그 편집장은 풍경 화가인 자신의 아우가 트리위의 친구라는 것, 그리고 마침 그 둘이서 지금 웨일즈 지방을 여행중이라고 말했다.
엘라는 이 편집장의 아우인 화가와도 안면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그 화가에게 편지를 써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디 자기 집에 들러서 며칠 동안 묵어가라고 초대했다. 또 친구인 트리위 씨와는 전부터 사귀고 싶었던 차여서 가능하면 함께 와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자기와 트리위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기꺼이 그녀의 초청에 응하겠으며 다음 주 이러이러한 날에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엘라는 기뻐서 팔짝 뛸 지경이었다.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마음속으로만 사모하면서 아직 만나보지 못한 그 사람이 드디어 오는 것이다. '저것 좀 봐, 그분이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그녀는 이렇게 하늘에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산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구약성경 아가의 2장의 구절 - 편집자 주*)
그런데 그가 와서 묵을 때의 잠자리며 식사 등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도 준비해야 한다. 그녀는 정성에 정성을 다해서 준비를 마치고 그날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후 다섯 시쯤 현관의 초인종이 울리고 편집장의 동생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라는 스스로 여류 시인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날은 요즘 유행하는 의상을 공들여 입었다. 최근 런던에 갔을 때 본드 거리에 있는 양장점에서 산 것으로, 예술과 낭만적인 취향을 즐기는 여인들에게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카이튼이란 옷과 비슷한 스타일의 의상이었다. 손님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님의 뒤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로버트 트리위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아, 정말 죄송합니다." 화가는 으레껏 하는 인사를 나눈 다음 이렇게 말했다. "트리위는 정말 묘한 친구예요. 마치밀 부인, 그 친구는 처음에는 꼭 오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올 수 엇다고 그러는 겁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여러 마일을 걸어와서 완전히 먼지투성이가 됐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집으로 가고싶어졌나 봅니다."
"그럼, 그분은... 그분은 오시지 않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대신 저더러 사과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분과 헤어지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그녀의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마치 트레몰로처럼 떨렸다. 그녀는 이 무섭도록 끔찍한 상황에서 달아나 어디론가 가서 마구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막 저 건너 큰길에서 헤어져서 이리로 오는 길입니다."
"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 집 문 앞을 지나쳤겠군요?"
"네, 그렇죠. 댁의 문 앞까지 왔을 때... 그런데 정말 훌륭한 문이더군요. 제가 봤던 현대식 철문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글쎄 여기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고는 잠깐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그만 헤어져서 돌아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지 뭡니까. 사실 지금 그 친구는 기분이 우울해서 아무도 만나기 싫다는 겁니다.
참 좋은 친구고 아주 다정한 성격입니다만, 이따금씩 변덕이라고나 할까요? 마음이 흔들리고 우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뭐든 심각하게 생각하는 성격이지요. 그 친구의 시도 어떤 사람들은 너무 에로틱하고 감정적이라고 그러더군요. 실은 어제 발간된 <** 평론> 잡지에서도 무척 혹평을 받았답니다. 우연히 역에서 그걸 읽은 겁니다. 아마 부인도 읽으셨겠지요?"
"아뇨."
"읽지 않기를 잘 하셨습니다. 그따위 글에 일일이 신경을 쓰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잡지의 편협한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편집자가 일부러 청탁해 쓴 글일 뿐입니다. 하지만 트리위는 그 글을 보고 무척 기분이 나빠진 모양입니다. 말도 안 되는 왜곡이라는 거죠. 정정당당하게 공격하는 것이야 견딜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왜곡이나 날조는 도저히 반박할 수도 없고 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견디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사실 이런 것이 트리위의 약점이죠. 사교계나 장사꾼들의 세상에서 얽혀 살다보면 그런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 혼자서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 박혀 있다 보니 별 것 아닌 것에도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는 겁니다. 이곳에 오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집이 너무 최신식이고... 이거 실례의 말씀 같습니다만, 집에 돈을 너무 많이 들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여기에 오시면 그분에게 따뜻하게 공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마 아셨을 텐데! 혹시 여기 주소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던가요?"
"아, 예... 그 말은 들었습니다. 존 아이비 씨라고 하던가요. 아마 부인의 친척이 마침 여기 와 있는 것일 거라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그분이 아이비를 좋아하신다는 말은 없으셨어요?"
"글쎄요, 그 친구가 아이비라는 분에게 별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럼, 그의 시에 대해서는?"
"글세, 제가 보기로는 그의 시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로버트 트리위는 그녀의 집이나 그녀의 시, 그리고 그것을 쓴 사람에게 전혀 흥미를 갖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그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게 되자 곧장 아이들에게 달려가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자신의 상한 감정을 씻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들마저 남편을 닮아서 무표정하고 평범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언짢고 혐오감이 치솟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환상을 좇는 여인 - 7.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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