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하고 단순한 풍경 화가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의 태도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그가 아니고 트리위였을 뿐이라는 것을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이 방문을 매우 유쾌하게 여기며 엘라의 남편과도 무척 잘 어울렸다. 남편도 이 화가가 매우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 근처를 여기저기 안내하며 화가에게 구경을 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둘 다 엘라의 심정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화가가 떠난 지 하루 이틀 정도 지난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이층 거실에 혼자 앉아 런던에서 방금 배달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다.
'시인의 자살
장래가 촉망되는 서정 시인으로서 최근 몇 년간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던 토버트 트리위 씨가 지난 토요일 밤 쏘렌트씨에 있는 숙소에서 권총으로 오른쪽 관자놀이를 쏘아 자살했다.
그는 최근 새로 <미지의 여인에게 드리는 노래>라는 시집을 내어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한 독자들의 주의를 끈 바 있다. 정열적인 내용의 그 시편들은 과거에 보기 드문 정서의 표현으로 인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본지 역시 거기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한 적도 있다.
다만 그의 새 시집은 어떤 평론 잡지에서 신랄한 비평을 받기도 했다. 문제의 그 잡지가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으며 그 비평이 소개된 이후 그가 매우 침울했다는 주위 사람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확실치는 않으나 이번 그 혹독한 평가가 이번 비극의 원인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문에는 검시 결과 등 경찰 수사 상황에 대해서도 알리고 있었다. 또 멀리 있는 친구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유서도 소개되어 있었다.
'*** 군에게
이 편지가 자네 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주위의 것을 보고 듣고 알게 되는 고통에서 벗어나 있을 걸세. 나는 나의 이 행동에 대해서 굳이 자네에게 구차한 설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네. 다만 나의 행동이 이유가 분명하고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둘 수 있네.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어머니나 누이, 혹은 그밖에 나를 다정하게 보살펴주는 여성을 보내 주셨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좀더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오랫동안 그런 여성,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여인을 동경해왔다네. 자네도 아다시피 그녀, 발견할 수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여인이 나의 마지막 시집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네.
세상에는 이러쿵저러쿵 수근거리는 모양이지만, 그 여인은 어디까지나 나의 환상 속에서만 살고 있는 여인일 뿐이네. 그 시집의 제목에서 말하는 그 여인은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네. 그녀는 끝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만날 수도 없었고, 끝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네. 그저 환상으로 끝난 셈이지.
혹시라도 어떤 여인이든 나를 거만하고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내가 자살했다는 오해를 빚을까봐 이렇게 밝히는 걸세. 누군가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여인이 오해로 인해 그런 비난을 받을 위험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것일세.
부디 하숙집 주인에게는 이런 불쾌한 일을 보여드려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게. 하지만 내가 그 방에 묵은 적이 있다는 것조차 아마 금방 잊혀지고 말겠지. 내가 지불해야 할 이런저런 비용 정도는 내 은행 구좌에 들어 있다네.'
엘라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옆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얼굴을 묻고 쓰러져 버렸다.
슬픔과 고통이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시간 동안이나 미칠 것 같은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쉴새없이 떨리는 입술로 그녀는 간신히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아, 그가 나를 알기만 했더라도... 나를, 나를 알기만 했다면! 아아, 내가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났더라면... 단 한 번이라도, 그래서 그의 뜨거운 이마에 내 손을 얹고... 키스를 하고,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줬더라면...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치나 비방이라도 기쁘게 감수하고,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을 것이라는 걸 알려줄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의 소중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아냐... 틀렸어! 이젠 다 틀렸어!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아! 하나님은 질투가 심하시거든. 그이와 나에게 그런 행복을 허용하셨을 리가 없지...'
소망은 이제 다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영영 만날 희망조차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소망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지금이라도 엘라의 환상 속에서 그런 시간은 거의 그대로 숨쉬고 있었다.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제 영원히 사라져버린 시간
남자와 여자의 마음이 품은 바람이건만
이제 그런 시간이 불가능해진 적막한 삶'
그녀는 제 삼자의 이름으로, 가능하면 감정을 억누른 온건한 문체로 쏘렌트씨에 있는 그 하숙집의 주인에게 편지를 썼다.
마치밀 부인이 신문에서 그 시인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는 것, 후퍼 부인도 아시다시피 마치밀 부인은 코버그 하우스에 머무는 동안 트리위 씨에게 무척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따라서 그의 관 뚜껑을 덮기 전에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 얻어서 보내주면 기념으로 삼고 싶어한다는 것 등을 적어 보낸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사진틀에 있던 사진도 함께 보내 주면 고맙겠다고 부탁했다. 그녀는 편지에 1파운드의 우편환을 동봉했다.
회신 우편으로 부탁한 물건이 왔다. 엘라는 사진을 받아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자기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트리위의 머리카락은 하얀 리본으로 묶어 품속에 고이 간직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가끔 꺼내어 입을 맞추곤 했다.
"도대체 그게 뭐요?"
어느 날 그녀가 또 그러고 있을 때 드디어 신문을 보던 남편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뭘 보고 우는 거요? 그거 머리카락 아니오? 그게 도대체 누구 머리카락이란 말이오?"
"죽었어요!" 그녀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누가?"
"꼭 말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 속에는 침통함이 배어 있었다.
"아아, 괜찮소. 그만두구려."
"얘기하지 않아서 불쾌하세요? 나중에 다 말씀을 드릴게요."
"괜찮아요, 그리 신경쓸 것 없소."
환상을 좇는 여인 - 8. 그가 죽다니...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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