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엘라는 또다시 그 집 여자 주인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자 집주인 역시 자진해서 그 시인에 관해서 이것저것 열심히 들려주는 것을 보면, 트리위에게 애정 비숫한 것을 품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것 보세요. 부인께서도 트리위 씨에게 상당히 흥미를 갖고 계신 모양이군요." 여자 주인은 말했다. "실은 방금 전에 그분에게서 연락이 왔답니다. 제가 만일 집에 있다면 내일 오후에 들러서 필요한 책을 좀 찾아가시겠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 그럼요!"
"만나보실 생각이 있으시면 그 때 트리위 씨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남모르는 즐거움을 느끼며 약속을 하고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엘! 어제 당신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소. 내가 밤낮 혼자 돌아다니고 당신 혼자서만 내버려두었다는 그 말 말이오. 아무래도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 오늘은 바다가 조용하니 함께 보트나 타는 게 어떨까 싶소."
남편이 그런 제안을 하는 데도 마음속으로 기쁘지 않았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그 자리에서는 남편의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그 시인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다른 생각을 모조리 압도하였다.
'가고 싶지 않아.' 그녀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무지 가고 싶지가 않아. 역시 가지 않는 게 좋겠어...'
그녀는 남편에게 뱃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고 말하였다. 남편은 그녀의 그런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고 혼자서 나가버렸다.
아이들도 모두 해변에 나가고 없어서 집안은 말할 수 없이 조용하였다. 담장 저편 바다에서 산들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햇볕이 비치는 가운데 창문 블라인드가 그 바람에 흔들렸다. 여름 한 철에만 고용되는, 그린 싸일리지언이라는 외국인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그 음악 소리에 끌려 몰려갔는지, 코버그 하우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가 손님을 맞으러 나가는 눈치가 보이지 않아 엘라는 몸이 달았다. 트리위가 가지러 온다는 책들은 지금 그녀가 앉아 있는 이 방에 있다. 그러나 아무도 올라오는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벨을 눌렀다.
"누군가 현관 문 앞에 온 모양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아뇨, 부인. 조금 전에 어떤 분이 오셨다가 금방 가셨어요. 제가 나가 보았는 걸요." 하녀가 대답했다. 그 때 후퍼 부인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거 정말 실망이에요..." 그녀가 들어오며 말했다. "트리위 씨는 결국 오시지 않는다는군요."
"그렇지만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아뇨, 그건 어떤 분이 세를 놓는 집으로 잘못 알고 방을 보려고 왔던 겁니다. 깜빡 잊고 말씀 못 드렸는데요... 점심 조금 전에 트리위 씨가 쪽지를 보내왔어요. 이제 책이 필요 없어져서 오지 않을 테니까 차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그랬더군요."
엘라는 비참할 정도로 실망하였다. 잠시 동안은 <찣겨진 생명>이란, 민요 형식으로 쓰인 트리위의 슬픈 시조차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들뜬 가슴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고, 쓰라린 심정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이들이 양말을 온통 적신 채 돌아와서 엄마 앞으로 달려오고 바닷가에서 겪은 온갖 경험담을 늘어놓아도 그녀는 여느 때의 절반만큼도 관심이 생기질 않았다.
***
"후퍼 부인, 혹시 저... 사진 가지신 것 있어요? 전에 여기 계시던 그분 사진 말이에요..." 엘라는 그의 이름을 직접 입에 담는 것이 이상하게도 부끄러웠다.
"네, 가지고 있답니다. 부인이 지금 쓰시는 침실 벽난로 선반 위 그 사진틀에 끼워져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그 액자에는 태공 부처의 사진이 들어 있던데요?"
"네, 그렇죠. 사실은 그분 사진이 그 밑에 들어 있답니다. 원래 그 분 사진을 넣어둔 액자예요. 제가 사온 것인데, 그분이 잠시 떠나시면서 제게 부탁을 했답니다. 제발 이 방에 들어오는 분들에게 자신의 사진이 눈에 띄지 않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 분 말씀이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싫고, 그 사람들 역시 자기 모습이 내려다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지요.
그래서 제가 그 양반 사진 앞에다 임시로 태공 부부의 사진을 끼워 넣은 거예요. 마침 다른 액자도 없는데다, 방을 장식하는 사진으로는 이름없는 젊은 청년보다는 왕족들 사진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 사진을 빼내면 그 아래 그분 사진이 있을 겁니다. 그 분이 아신다 해도 별로 상관없을 겁니다. 그분도 이 방에 오시는 분이 부인처럼 아름다운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아마 자기 사진을 숨길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지요."
"그분은 잘 생기신 분인가요?" 그녀는 두려운 듯이 이렇게 물었다.
"글쎄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요..."
"제가 보기에도 그럴까요?" 그녀는 진지하게 물었다.
"부인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 생겼다기보다는 엄격한 인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눈이 크고 날카로운데, 늘 생각에 잠긴 것 같아요. 예민하게 주위를 살필 때면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시를 써서 먹고사는 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이에요."
"그 분은 나이가 얼마나 되었지요?"
"아마 부인보다는 서너 살 위일 것 같아요. 서른 한 두 살 정도 되었을 것 같은데요."
사실 엘라도 서른을 넘긴 나이였다. 다만 누구도 그렇게 나이 들게 보지는 않았다. 그녀의 천성은 여리고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그녀의 나이는 이미, 첫사랑보다는 마지막 사랑이 훨씬 더 강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나이였다.
여자들이 지금 그녀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을 경우, 허영심이 강한 여자라면 창문에 등을 돌리거나 덧문을 반쯤 내리지 않고서는 찾아온 남자 손님을 만나는 것을 망설이게 될 것이다. 그런 쓸쓸한 인생의 시기가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후퍼 부인이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고는 더 이상 나이에 대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마침 그때 전보가 한 장 왔다. 남편이 보낸 것이었다. 남편은 친구들과 함께 요트로 해협을 따라 버드머스까지 왔으며, 다음 날에나 돌아올 수 있겠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