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마치밀은 여섯 시에 잠을 깼다. 엘라는 남편이 일어나 하품을 하면서 혼자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거, 밑에서 버석거리는 게 도대체 뭐야?"
그는 아내가 아직 자고 있는 걸로 여기고 여기저기 뒤지다가 무엇인가 끄집어냈다.
"제기랄, 이게 도대체 뭐야?" 남편이 소리쳤다.
"여보, 왜 그러세요?" 아내가 물었다.
"그래, 당신도 일어났소? 이런 세상에, 하하하!"
"도대체 왜 그러세요?"
"도대체 생전 본 일도 없는 녀석의 사진이야. 여기 집주인이 아는 사람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여기 와 있을까? 자리를 고쳐놓을 때 선반을 건드려서 굴러떨어졌나 보군!"
"어제 내가 보던 사진이에요. 아마 그 때 떨어졌나 보군요."
"그래? 당신이 아는 사람이라구? 꽤 멀쩡하게 생긴 친구로군."
엘라는 자신이 존경하는 그 대상이 남편의 조소를 받는 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반응은 어딘지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요즘 아주 유망한 시인이에요. 나는 아직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지만 말이에요. 우리가 여기 오기 전에 이 방 두 개를 쓰고 있던 사람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오?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면서 말이야..."
"후퍼 부인이 어제 저한테 사진을 보여 주면서 말하더군요."
"아, 그래? 자 그럼 난 이제 가봐야겠소. 오늘은 조금 일찍 돌아오리다. 함께 가지 못해서 미안하오. 아이들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 줘요."
그날 마치밀 부인은 후퍼 부인에게 트리위 씨가 언제쯤 다시 올 것 같으냐고 물어봤다.
"오실 거예요. 일 주일 뒤에 오셔서 이 근방에 있는 친구 집에 묵으실 거라고 하더군요. 부인 댁이 떠나실 때까지 거기 계시겠지요. 그땐 꼭 오실 거예요."
마치밀은 그날 오후 일찍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 도착한 편지들을 죽 뜯어보더니 갑자기 원래 예정보다 일 주일 앞당겨서, 사흘 후에 가족 모두 여기를 떠나자고 말했다.
"하지만 여보, 일 주일쯤 더 있다 가면 안될까요?" 엘라는 애원이라도 하듯이 남편에게 말했다. "전 여기가 퍽 마음에 들어요."
"난 그렇지 않은 걸. 점점 싫증이 난단 말이오."
"그럼 나하고 아이들은 남겨 두고 혼자 가시는 게 어때요?"
"엘라, 참 당신도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구려. 왜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이오? 게다가 내가 그럼 또 당신을 데리러 올 것도 생각해 봐요. 역시 함께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 그 대신 조금 더 있다가 노스웨일즈나 브라이튼에라도 가서 지내면 될 것 아니오? 게다가 여기서도 앞으로 사흘 동안이나 더 있을 수 있잖소!"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시적 재능에 경탄했던 그 남자,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애정을 느끼는 그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숙명인가 보다! 하지만 엘라는 마지막으로 노력을 해보고 싶었다. 그녀는 집주인 여자로부터 트리위가 맞은편 섬 번화한 시가지에서 별로 멀지 않은 조용한 곳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대충 알아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오후 엘라는 가까운 선창에서 여객선을 타고 그 섬에 건너가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헛된 여행이었던가! 엘라는 그 집 위치를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가까스로 그의 집이라고 여겨지는 곳을 찾아낸 다음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저 집에 시인이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모른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또 설령 그가 거기에 산다고 하더라도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감히 방문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세상에는 그만큼 배짱이 두둑한 여자도 있겠지만 엘라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불쑥 찾아가면 아마 그는 미친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냥 한 번 방문해 달라고 청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라는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그녀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닷가 언덕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방황했다. 그리고 이윽고 시간이 되자 돌아가는 배를 탔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나 저녁 시간에 늦지 않게 가까스로 돌아와서 그녀는 별로 의심을 받지 않았다.
드디어 런던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자 남편은 뜻밖에도 정 남아 있고 싶으면 주말까지 아이들과 함께 여기 머물러 있어도 좋다고 말했다. 다만 나중에 자기가 데리러 오지 않아도 좋다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그녀는 속으로 무척 기뻤으나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마치밀은 다음날 아침 혼자서 돌아갔다.
그러나 트리위는 그 주가 다 지나가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에 마치밀의 나머지 가족들은 그녀에게 그렇게 정열을 불러일으켰던 그 고장을 떠났다. 쓸쓸하고 지루한 기차 여행, 먼지투성이 좌석에 햇볕이 내리쬐어 뜨겁게 달구고 있다. 길게 뻗은 더러운 철로, 낮게 드리운 전선들, 이런 것들만이 그녀의 길동무였다. 창 너머로 보이던 짙푸른 수평선도 마침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와 함께 그 시인의 집도 아득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그저 눈물만 나왔다.
마치밀 씨의 사업은 무척 순탄했다. 덕분에 그의 가족은 넓은 대지 위에 세운 커다란 새 저택에 살고 있었다. 그 집은 그의 사무실이 있는 중부 지방의 도시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교외의 생활이 으레 그렇듯이 엘라의 생활은, 특히 어떤 계절에는 몹시 쓸쓸했다. 그래서 엘라는 취미인 서정시나 비가를 쓸 시간이 많았다.
그녀는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애독하던 잡지 최신호에 트리위의 시가 실린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쏘렌트씨로 피서를 가기 직전에 쓴 것이 틀림없다. 그 침대 옆 벽지에 연필로 써 놓은, 후퍼 부인이 최근에 쓴 것이라고 말했던 그 시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엘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충동적으로 펜을 들고 존 아이비라는 이름으로 동료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보내는 축하 편지를 썼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시를 쓰지만 자신이 무척 노력하면서도 별로 훌륭한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데 비해, 그는 자기 영혼을 움직이는 사상을 훌륭하게 운율로 만들어내고 리듬을 맞추는 재주를 갖고 있다고 칭찬하는 편지를 썼던 것이다.
뜻밖에도 트리위는 이 편지에 답장을 보내왔다. 2,3일 후 트리위는 예의 바르면서도 짤막하게 자기는 아이비 씨의 작품을 잘 모르지만 언젠가 그 이름으로 아주 촉망받았던 시가 두어 편 실렸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또 이렇게 아이비 씨와 편지로 시귀게 된 것이 매우 기쁘며 앞으로 쓰는 작품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환상을 좇는 여인 - 6. 결국 바닷가를 떠나서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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