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마치밀 일가는 이튿날 그 집에 짐을 풀었다. 집은 지내기는 편할 것 같았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남편은 부두로 산책을 나갔고 마치밀 부인은 아이들을 모래사장으로 놀라고 내보냈다. 그런 다음 부인은 한숨 돌리고 이것저것 살펴보기도 하고, 옷장 문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그 젊은 신사가 쓰던 뒤쪽 작은 거실에는 그의 가구들이 남겨져 있어 어딘지 그의 개인적인 취향이 느껴졌다. 희귀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인의 정확한 안목이 느껴지는 그런 낡은 책들이 방 구석구석에 차곡차곡 조심스럽게 쌓여 있었다. 아마 이 방의 주인은 피서철에 여기를 찾는 사람들이 이런 책에 흥미를 느끼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이 방의 전 주인은 눈에 잘 안 띄도록 구석에 책을 쌓아 놓았다.
집주인 여자는 마치밀 부인이 뭔가 못마땅하다고 말하면 곧바로 고칠 생각인지 그 방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책들이 있어 좋군요. 이 방을 제가 쓰면 좋겠어요." 마치밀 부인이 말하였다. "그런데 방을 내주신 분은 책이 무척 많으신 모양이에요. 제가 좀 읽어도 괜찮을까요, 후퍼 부인?"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부인, 그분은 책이 참 많으시답니다. 문학을 하시는 분이거든요. 사실 그분은 시인이랍니다. 예, 시인이요... 이름도 알려지신 분이래요. 그리 대단한 부자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시를 쓰며 살 정도의 수입도 있으신 모양이에요."
"시인이라구요? 어머나! 그런 줄은 전혀 몰랐군요."
엘라는 책을 한 권을 집어들고서 첫 장에 있는 주인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어머나!" 그녀는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말을 계속하였다. "저도 잘 아는 이름이에요. 로버트 트리위... 잘 알고 말고요. 이분의 시도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빌린 방이 바로 그분 방이라니, 우리가 그분을 쫓아낸 셈이네요."
잠시 후 엘라 마치밀은 혼자 남아서 로버트 트리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런 우연이었다. 그녀의 이런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는 불우한 문인의 외동딸이었고, 최근 한두 해 동안은 자신도 직접 시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감정의 돌파구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 평범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면서 그녀의 정신은 우울한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날의 밝고 반짝이던 영감이나 명석함이 모두 떠나버린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쓴 시를 남자 이름으로 별로 이름 없는 잡지에 기고해서 실린 적이 있었다. 상당히 이름 있는 잡지에 시가 두 번 실리기도 했다.
이름 있는 잡지에 그녀의 시가 두 번째로 실렸을 때, 공교롭게도 그 잡지에는 로버트 트리위의 시가 함께 실렸다. 그녀의 시가 작은 활자로 아래에 실리고 바로 그 위에 로버트 트리위가 같은 주제로 쓴 시가 여러 편 커다란 활자로 실렸던 것이다.
사실 이들 두 사람은 신문에 보도된 어떤 비극적인 사건을 보고 놀라 동시에 거기 관한 시를 쓴 것이었다. 편집자는 주를 달아 이 두 사람의 시가 우연히 일치했다는 것을 밝히고 둘 다 훌륭한 작품이어서 함께 발표한다고 설명했다.
'존 아이비'라는 필명으로 그 동안 시를 발표해왔던 엘라는 이 일이 있은 뒤부터 로버트 트리위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보통 남성의 경우 당연한 것이지만, 로버트 트리위는 작가의 성별 차이라는 것에 대해 아마 거의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여성의 이름을 쓸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해본 일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엘라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즉 세상을 거꾸로 가는 데에서 나름대로 이유를 발견하고 거기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시에 표현한 그녀의 세련된 감수성이 수완 좋은 사업가의 아내, 평범한 총기 제조업자의 부인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의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녀의 그 영감을 신뢰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트리위의 시는 기발하기보다 정열적이고, 세련됐다기보다 풍부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그만그만한 시인들의 작품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상징주의자도 데카당도 아니었다. 인생에 있는 최악의 우연조차도 인생의 가장 행복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염세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는 그런 점에서 염세주의자였다.
그는 내용과 상관없이 단지 형식과 운율만이 앞선 시에 대해서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그의 감정이 예술적 형식을 능가할 때는 운이 맞지 않는 엘리자베스 왕조 양식의 소네트를 써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말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실수를 지적받곤 하였다.
엘라 마치밀은 이 경쟁자의 작품을 수없이 읽어보고 되풀이해서 읊어보곤 했다. 그것은 슬프지만 도저히 이루어질 가망이 없는 질투심인 셈이었다. 자신의 미약한 작품과 비교할수록 그의 시가 얼마나 힘찬 것인지 그녀는 새삼스럽게 느끼곤 했다. 그의 시를 흉내내기도 해봤지만 도저히 그의 수준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완전히 실망에 빠질 때도 있었다.
몇 달 후 그녀는 출판사의 광고를 통해 트리위가 그 동안 발표했던 작품들을 한 데 모아 한 권의 시집을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뒤 그 시집이 실제로 출판되었으며 어느 정도 평판도 얻었다. 적어도 그 시집은 출판 비용을 충당할 정도는 팔렸다.
존 아이비는 이와 같은 사태 진전에 자극을 받아 자신도 지금까지 그리 많지는 않지만 발표된 몇 편의 시와 미발표 원고들을 덧붙여 한 권의 시집을 만들어 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출판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두서넛 잡지 평론이 그녀의 시집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지만 보통 화제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시집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그 시집은 세상의 빛을 본 지 이 주일 뒤에는 영영 묻혀 버리게 되었다.
우연히도 그 무렵 이 시인은 자신이 셋째 아이를 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또한 집안에 비교적 걱정거리가 없었던 때였던지라 시집 출판의 실패는 별 타격 없이 그냥 지나갈 수 있었다. 남편은 병원 치료비와 출판사 경비을 한꺼번에 책임졌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당분간 모든 일은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그녀는 물론 한 세기를 풍미하는 시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흔해 빠진 엉터리, 단순히 종족을 늘리는 역할에 그치는 그런 여자도 아니었다. 엘라는 최근 들어 과거의 시적 영감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우연히도 그녀는 로버트 트리위의 방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녀는 뭔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 시인으로서의 흥미를 지니고 방안을 여기저기 살폈다. 다른 책들 사이에 트리위의 시집도 끼어 있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그 시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그것이 새삼스럽게 말을 걸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핑계삼아 안주인 후퍼 부인을 불러 다시 한 번 그 젊은 시인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럼 그 분을 한 번 만나보시지요. 무척 재미있는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분은 낯을 가리시는 편이기 때문에 쉽게 만나려고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후퍼 부인은 그 방의 이전 거주자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 주는 것이 오히려 기쁜 것 같았다.
"여기 산 지 오래되었냐구요? 그렇지요, 거의 이년 가까이 되었답니다. 여기 계시지 않더라도 항상 방은 그대로 두고 있었으니까요. 아마 이 지방의 맑은 공기가 그분 가슴에 좋다나 봐요. 그래서 언제든지 마음 내키면 훌쩍 찾아오시는 걸 좋아하죠. 그분은 대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고, 사람들은 그다지 많이 만나지 않아요. 하지만 정말 마음이 좋고 친절한 분이랍니다. 그러니까 한 번 만나보기만 하면 누구든지 그분과 가까워지고 싶을 거예요. 그렇게 성품이 부드러운 분은 요즘 세상이 그다지 흔치 않으니까요."
환상을 좇는 여인 - 2. 시인의 방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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