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찐라면
논산훈련소 훈련병 시절엔 우리 모두 먹을 것에 집착했었다. 훈련이 너무 고되어서 많이 먹어두지 않으면 훈련을 버티어낼 수 없으리라는 강박관념 탓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먹을 것만 많이 준다면 어떤 훈련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다 재수가 없어 배식을 적게 받으면 눈물이 핑 돌곤 했었다. 밥 한 톨, 김치 한오라기도 남김없이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하루는 야간 훈련이 있어서 배식차가 야외 훈련장까지 왔었다. 비가 주룩주록 왔지만 훈련은 예정대로 강행되었다. 받아든 식판엔 밥이 절반 빗물이 절반이었다. 배식하는 놈이 가늠을 잘못해서 처음부터 너무 많이 퍼주었기 때문에 뒷줄로 갈수록 배식량이 줄어 들었다. 멀리서 줄어드는 식깡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자 득득 바닥 긁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긁어서라도 두세 차례 퍼줄 줄 알았는데 단 한 차례의 주걱질로 끝이다. 겨우 식판 귀퉁이에 주걱 문지른 자국만 남아 있었다. 분노와 절망의 눈물이 솟구쳐 올랐지만 거기서 엉기다가는 기간병에게 쪼인트를 까이거나 국자로 얻어맞기 십상이다,
한 쪽에 소대장과 분대장들이 판쵸 우의를 깔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울분을 참고 그 주변 가까운 곳에서 식사를 했다. 혹시 그들이 남긴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나 같은 생각을 가진 놈들이 주변에서 밥을 먹으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다른 놈들은 일찌감치 식판을 반납했는데 아직 미련이 남아 붙들고 있는 내 식판엔 빗물이 가득 차서 넘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먹을 것에 온 신경을 모으고 머릿속엔 온갖 음식을 공상하는데 훈련소 식단은 거의 매일 동일하였다. 반 한 그릇, 국 한 그릇, 반찬 한두 가지가 고작이었다. 맛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배만 채워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훈련소에도 별미는 있었다.
그것은 일요일 점심으로 특별히 제공되던 라면이었다. 원래부터 라면을 좋아했지만 훈련소의 그 라면 맛은 정말 특별했다. 조리법이 사회와 달랐던 것이다. 그 많은 수를 먹이려니 아마 특별한 조리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찐 라면이리라. 일일이 한 그릇씩 끓여 낼 수는 없고 한꺼번에 끓여내면 퍼지기가 십상이었으리라. 그래서 라면의 면발만 따로 분리해서 고압 수증기로 쩌내는 기상천외의 조리법이 생겨났으리라.
약간 곁 이야기지만 훈련소의 사역 중 최고의 사역은 단연 라면 분리 작업이었다. 라면의 봉지를 뜯어서 면발과 수프 봉지를 따로 분리하는 작업이었다. 일이 편한 것도 있지만 취사병의 감시를 피해 수프 몇 봉지를 셔츠 안에 숨겨올 수 있다는 망외의 소득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 수프를 밍밍한 국에다 풀어 먹으면 국에서 오색 향취가 날 정도로 맛이 달라졌다.
좌우간 우리는 수증기로 삶아낸 면발을 두 개씩 배급받았다. 그대로 쪄내서인지 면발의 모양은 조금도 흐트리지지 않은 채였다. 그 면발 위에 수프만 따로 끓인 뜨거운 국물을 부어주었다. 면발은 약간 꼬돌꼬돌했는데 그 맛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나는 꼬돌꼬돌한 면발의 매니어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끓는 물에 라면을 넣고 형태가 풀리기 전에 불을 꺼버린다. 국물도 그 때처럼 수프만 넣은 맨 국물 그대로가 좋다. 달걀을 풀면 오히려 개운한 맛이 사라지고 만다. 면발의 느낌이 살아있는 그대로 뜨거운 국물에 휘휘 저어 먹으면 얼굴에 땀이 확 솟으며 속이 다 후련해진다. 그러나 훈련소의 찐 라면은 분명 그 이상의 흉내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제대 후에 어떤 동기 녀석이 그 라면 맛을 못잊어 집에서 밥을 할 때 뜸들이는 밥솥에 라면을 집어 넣어서 라면을 쪄볼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군대의 일을 사회에서 재현해 보려는 것은 멍청한 중에서도 우둔한 짓이 아닐까? 그 라면 맛을 다시 맛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장정 대기소를 거쳐 논산훈련소의 연병장을 다시 밟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