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첫키스
음식 맛의 으뜸은 누가 뭐래도 재료의 신선함에 있다. 피가 뚝뚝 듣는 꼬막은 삶은 자리에서 밥 없이도 한 사발 정도는 거뜬히 까먹을 수 있다. 한 마을에서 하룻밤 까먹는 꼬막만으로도 한 무더기의 패총 정도는 너끈히 쌓아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재료가 신선한 음식은 그 특징이 별 양념이 없어도 각별한 맛이 난다는 것이다. 한 여름 모깃불 옆에서 끓여 먹는 반지락국은 소금 한 술 정도로 훌륭한 맛이 났다. 고아 먹는 국물과는 또 다른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맛이었다. 갯가에서 조심스럽게 돌로 찧어 윗 껍질로 파먹는 석화는 아무 양념 없이도 후루룩 마시면 바다의 짭조름한 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한 번은 군대 있을 때 소대장을 따라 해안 초소를 도는데 우연히 주막에 들렀다가 문조리(망둥어) 한 접시를 대접받은 적이 있다. 못 생긴데다 흔해 빠진 고기라 밥상에 올리기도 꺼려하는 천덕꾸러기다. 낚시로 막 잡아온 그걸 도마에서 숭덩숭덩 썰어 이빠진 접시에 담아 내왔다. 초장에 식초 원료를 사용했는지 온 주막 전체가 독한 식초 냄새로 진동을 했다. 몇 점을 씹을 때까지 식초 맛 때문에 입안이 얼얼했다. 그러나 문조리의 싱싱한 맛은 결국 그 독한 식초 맛을 이기고 뇌리 깊숙이까지 전해졌다.
불은 인간에게 보다 풍요롭고 다채로운 맛을 선사했다. 모든 동물 중에서 불을 다룰 줄 아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화식(火食)을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채화 이후에 마치 연금술사들처럼 인간은 모든 음식을 불 위에서 다루어 본다. 지지고 볶고 삶고 튀기고 찌고 덖어 본다. 불을 강하게도 해보고 약하게도 해본다. 장작불도 써보고 숯불도 써보고 석탄과 가스도 사용해 본다. 그때마다 맛들은 희한하게 변한다. 인간의 음식은 점점 다양해지고 인간의 입은 점점 사치스러워진다. 불은 인간을 점점 인위적인 맛에 길들어지게 하고 자연의 맛에서는 멀어지게 한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직접 부딪히는 그 생동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순환의 굴레 속에서 영원히 자연이 주는 그 싱싱한 맛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싱싱함이 맛에 미치는 영향은 비단 해산물에만 국한 되는건 아니다. 과일이야말로 싱싱함이 생명이다. 과일은 꽃과 마찬가지로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부터 시들기 시작한다. 과일의 참맛을 보려면 반드시 제 철에, 제 때에 맞춰, 제 산지에서 먹어야 한다.
사과는 제 맛으로 먹기 힘든 과일 중의 하나다. 자칫하면 너무 시거나 너무 무르거나 너무 퍽퍽하다. 일광이 알맞게 스며들었을 때, 너무 설익지도 너무 농익지도 않은 바로 그 순간 사과를 따야한다. 가지가 너무 당겨지거나 너무 맥없이 떨어지지 않고 적당히 버팅기면서 똑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사과를 따야 한다. 푸르고도 청신한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깊숙한 곳에서부터 농염함이 스며나오는 바로 그 순간. 아침의 서리를 오후의 일광이 녹이는 바로 그 순간. 사과를 뚝 따서 바지춤에 두어 번 문지르고는 크게 한 입 베어 물어 보라. 베어 무는 그 순간 사과 주변에 작은 오로라가 생기면서 오색의 향취가 번져 나간다. 사과의 신맛이 목젖을 쏘고 이윽고 단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그 풍부하고 향기로운 즙이 목으로 코로 혀로 이로 폐부로 스며드는걸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맛을 무엇에다 비유하랴. 굳이 지상에서 그 맛에 합당한 비유를 찾자면 그건 첫 키스의 맛이다. 첫 키스의 향기이다.
그러나 냉큼 다가온 국외자에게 사과는 결코 그 깊은 맛을 전하지 않는다. 봄부터 가꾸고 기르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염려했던 농부에게만 그 깊은 맛을 전한다. 나의 첫 키스도 그런 오랜 기다림이었다. 봄 아지랑이 같은 마음 저림에서부터 여름날의 폭풍 같은 격정을 이기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듯한 쓸쓸한 가을날 나의 첫 키스는 찾아왔다. 마치 사과의 신맛처럼 강렬하게, 단맛처럼 달콤하고도 애처롭게, 오랜 기다림의 보답처럼 그렇게 깊숙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