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할머니의 조청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먹을 것이 궁했다. 버스길도 없는 시골이라 당연히 구멍가게 하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시골 먹거리들이 다 별미지만 어렸을 때는 단 것만 찾을 때라 항상 입이 궁금했다. 겨울에는 방구석에 큰 대우리가 있었고 그 안에 고구마를 보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고향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작 감자는 하지 감자라고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감자라는 말이 더 귀에 익다. 감자는 사투리가 아니라 일종의 한자어다. 사투리인줄 알았던 말 중에서 나중에 보면 한자어인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굴도 석화(石花)라고 불렀다. 변소도 칫간(厠間)이라고 불렀다. 아마 유배지였던 탓인 것 같다.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몇 몇 양반들이 쓰시던 말을 이 지역 사람들이 고대로 답습한 것이다. 좌우간 그 감자를 겨우내 깎아 먹는 것이 유일한 군것질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명절 전후해서 할머니가 인절미를 해줬던 기억이 난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쌀을 절구에 넣고 쿵쿵 찧었다. 이윽고 쫄깃쫄깃한 떡살이 되었는데 한 때기 뚝 떼서 콩고물에 굴리면 그대로 인절미가 되었다. 할머니 혼자 찧은 떡이라 먹다 보면 아직도 밥알이 씹혔다. 떡도 떡이지만 그 떡에 발라먹는 조청 맛이 기가 막혔다. 어린 속이지만 그 맛이 하두 기가 막혀 ‘할머니, 이 조청 뭘로 만들었어요?’ 라고 물었더니 ‘옥쪼시(옥수수)로 만들재’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 맛은 그 이후에 먹어 봤던 어떤 꿀이나 물엿보다도 맛있었다. 끈적이지도 않고 술술 넘어갔고 먹고 나면 입 안에 감칠맛이 돌았다.
그 맛에 가장 근사한 것은 강천산 밑의 한봉이었는데 조청 맛에 비하면 그 맛은 너무 강렬하고 너무 달았다. 할머니는 그 조청을 한 되들이 소주병에 담아서 선반에 올려놓았는데 나는 그것을 몰래 훔쳐 먹곤 했다. 조청은 보시기에 조금씩 따라 떡을 찍어 먹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어쩐지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마시는 건 몰래 해야 할 짓 같았다. 찍어먹는 맛과 둘러 마시는 맛은 또 달랐다. 그 맛은 거칠고 너무 달았다. 미약처럼 귀 끝이 홧홧했다. 그 이후로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조청 맛을 찾았다. 그 맛의 기억은 지금도 선연한데 그 맛은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 조청을 만든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재취셨다. 그러니까 사실은 친할머니는 아닌 셈이다. 할아버지가 육이오 때 돌아가시고 지금 생각해 보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셨다. 처녀로 시집오셨는데 순박하신 분이었고 자기 주장은 전혀 없는 분이었다. 항상 표정이나 행동이 여일(如一)하신 분이셨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가끔은 이상한 행동을 하셨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내 형제들도 다 한 번씩은 목격한 바가 있었다. 겨울이면 불을 부엌이 붙은 안방에만 땠다. 그래서 한 식구가 모두 한 방에 모여서 잤다. 다람쥐 눈만한 초꼬지불도 석유를 아끼느라 금방 꺼버렸다. 그래서 시골의 겨울밤은 길고 길었고 그러다 보니 어쩌다 한 밤중에 눈이 뜨였다. 방이 환했다.
빛 때문에 잠이 깨었을까? 천장 더그매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윗목에서 구시렁구시렁 사람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듯한 낯선 소리였다.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인하여 잠이 깬 기척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고개만 빼어 그 쪽을 바라봤다. 끄먹거리는 초꼬지불 앞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를 길게 풀어 헤치고. 혼자서 뭐라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염불 같기고 하고 누구에겐가 하소연하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형제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그 때의 할머니는 평상시와 너무나 다른 무슨 마녀나 귀신처럼 보였다고 했다. 무섭다기보다는 궁금했다. 무슨 까닭일까? 그러다가 설핏 잠이 들면 봉창이 훤하게 밝아 있었고 구구구 하는 할머니의 닭 모이 주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다시 말끔한 비녀 머리를 하고 계셨다. 내가 꿈을 꾸었거나 아니면 할머니가 밤중에 머리를 감고 나서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셨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나중에 부모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두운 표정을 지으시고 다른 말씀은 없었다. 그 할머니가 만든 조청 맛은 할머니의 그 비밀스런 의식과 함께 나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