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짜장면과 해삼

 

어린 시절에 최고 별미는 짜장면이었다. 지금도 짜장면을 좋아하지만 주로 배달 위주여서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북경요리라든가 사천요리라든가를 전문으로 하는 거대 호화 중국집의 짜장면 맛도 별로다. 물론 다른 기름진 음식맛에 질린 탓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그 허름한 중국집에서 먹었던 짜장면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짜장면을 좋아했던지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틈틈이 모아 혼자서 짜장면을 사먹으러 간 적도 있었다. 짜장면을 시키자 의자에서 게으르게 졸고 있던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남루한 커튼 너머로 그가 면발을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반죽을 길게 말더니 그것을 거의 천정에까지 닿도록 두세 번 흔들고는 땅하고 바닥에 내리쳤다. 그리고 그걸 접어서 밀가루를 뿌리고 다시 늘려서 흔들었다 내리쳤다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나서 양 끝을 칼로 따고 손으로 이리저리 풀어 헤치니까 신기하게도 뭉툭한 밀가루 반죽이 섬세하고 가지런한 면발로 쫙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내 눈에는 어떤 세계적인 마술사의 현란한 솜씨도 흉내낼 수 없는 박진감 있고 현실감 있는 마술처럼 보였다. 그는 그 면발을 채에 담은 채로 뜨거운 물에 넣어서 금방 삶아내었다. 그것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짜장을 끼얹어 단무지 한 접시와 함께 내 앞에 내려 놓았다. 생생한 면발에서는 뜨끈뜨끈한 김이 솟아나고 있었고 짜장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혹적인 냄새가 풍겼다.

 

어린 시절의 음식 맛을 잊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래도 성(性)이 본격적으로 계발되기 이전에는 모든 감각이 미각에 치중되는 까닭인 듯 싶다. 그 당시 학교 담 주변에는 하교하는 아이들의 입맛을 꼬드기는 음식 장사들이 많았다. 칡도 팔았고 단팥죽도 팔았고 띠기라고 하는 약간 사행성이 있는 설탕을 녹여 만든 과자도 팔았다.

 

그러나 그 모든 군것질거리를 제치고 단연 나를 매료시킨 것은 해삼 좌판이었다. 크고 작은 해삼들이 가격에 맞춰 좍 배열되어 있었다. 가까이 가면 시큼한 초장 냄새가 벌써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어린애 새끼 손가락만한 해삼에서부터 큼직한 오이만한 해삼까지 크기도 갖가지였고 굵기도 갖가지였다. 큰 해삼들은 우리들의 푼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것들은 돈 많은 어른들의 몫이었다. 검고 우둘투둘한 돌기가 우람했던 그 큰 해삼들은 다분히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전시용이었다(‘언젠가는 돈 많이 벌어서 저 해삼을 사먹고 말리라’던 욕망이 내 무의식의 어딘가 잠재해 있다가 지금도 마트에만 가면 돌출해 나온다).

 

5원짜리는 두 토막을 냈고 10원짜리는 다섯 토막을 냈다. 1원짜리 해삼은 5원짜리나 10원짜리를 아주 가늘게 썰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한 입 꺼리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좌판 앞에서 항상 망설이게 되었다. 궁색한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오늘 한 번 큰일을 벌려 버려.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치면서도 주머니의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언제나 1원짜리나 5원짜리로 현실과 타협하고 말았다. 그 가느다란 해삼을 핀으로 찍어 먹는데 문제는 얼마나 요령있게 초장을 많이 찍어 먹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초장은 집에서 만든 초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주 묽은 초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더 시큼하고 더 달고 더 시원한 맛이 났다. 어떤 녀석은 1원짜리를 먹으면서 그냥 찍어 먹는 것이 아니라 초장 그릇에 코를 박고 둘러 마셔서 주인아저씨한테 꿀밤을 먹는 것도 보았다. 5원짜리를 먹든 10원짜리를 먹든 언제나 아쉬웠다. 그래서 다 먹고 나서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그 큰 해삼들을 바라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아쉬움은 언제나 치명적인 것이다. 그 아쉬움 때문에 나는 한동안 해삼에 중독되어 살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아무리 해삼을 많이 먹어도 어렸을 때의 그 아쉬움은 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