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홍어애국

 진도에 한 후배가 산다고 해서 찾아가 본 적이 있었다. 몇 번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얼굴을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뚜렷한 직장을 가져본 적도 없고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며 시인이면서도 시에 전념하는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이 내가 그에 대하여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물론 자유로워 보였지만 댄디해 보이지는 않는 그냥 시골 촌놈이었다. 술에 좀 쩔어보인다 싶더니만 결국 그 날 동행한 또 한 명의 후배와 술로 날밤을 세우는 모양이었다. 시보다는 진도의 역사와 문화가 주된 화제였는데 어찌나 해박한지 거의 향토사학자 수준은 되어 보였다.

 

 취중의 그와 바둑 한 판을 두었는데 취한 놈이 무슨 상대가 되랴 싶었지만, 웬걸 완전히 취권이었다. 겉보기에 취한 놈들이 나중에 보면 정신은 항상 말짱했다는 걸 알게되면 뒤늦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가 등단했다는 문예잡지를 건네 받고는 화장실에서 시 몇 편을 읽었다. 이상이 그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썼음직한 시였다. 그가 한 때 인천에 살았으며 아내는 공장에 나가고 그는 무슨 일로 뒷방에 남아 울분을 토한다는 시였다. 물론 이상보다는 훨씬 건강한 감수성이었지만 어쩐지 상황이 '이상'스러웠다.

 

 어찌어찌 새벽잠이 들었고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났지만 시골 읍면 단위의 시간이 그러하듯 조금도 쫒기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진도 문인협횐가 하는 사무실도 들르고 어슬렁어슬렁 후배가 이끄는 대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시골에 가서 음식점 찾기가 난망스럽거든 대개 군청 앞으로 가라는 속설이 있다. 그래도 그 곳에서 내로라하는 음식점은 꼭 군청 근처에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후배는 우리를 군청 앞으로 끌고 갔다. 그러더니 군청 앞에서 오른쪽으로 틀고 한참을 가서 또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좀 오래돼 보이는 골목에 얕은 집들이 나오고 결국 간판 하나 없는 도저히 식당처럼 보이지 않는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주머니 한 분이 후배와 몇 마디 아는 체를 하고 우리는 후배를 따라 그 집에서도 가장 후미지고도 컴컴한 방으로 들어갔다.

 

 낡은 이불이 깔려있는 그 방은 의외로 따뜻했다. 밥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벽에 등을 기대고 또 설핏 잠이 들었나 보았다. 달그락달그락 밥상 위에 음식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보다 조금 앞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음식 냄새가 우리의 잠과 식욕을 동시에 흔들어 깨웠다.

 

 "이거 그래도 귀한 건데 입에 맞으실랑가 모르겄소?"

 

 그것은 홍어애국이었다. 전라도에서 홍어는 잔칫집이나 상갓집에 반드시 오르는 음식이었고 또 사람들이 좋아해서 수시로 먹게 되는 음식이지만 홍어애국은 참 오래간만이었다. 홍어애를 보리 된장국에 넣어 푹푹 끓인건데 어린 보리와 홍어애의 조화가 절묘했다.

 

 첫 숟갈을 뜨는 순간 이곳이 진도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맵싸하고 구수한 맛과 함께 더운 기운이 온몸으로 확 번져 나갔다. 그것은 뭐랄까, 어리고 풋풋한 보리가 뚫고나온 겨울 대지의 기운이 서해 심해의 맑은 해수에 녹아드는 맛이랄까, 아니면 겨울에 곰삭은 거름더미에 새봄의 눈이 젖어드는 맛이랄까, 뭐 그런 좀 형용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요새는 전라도 음식이 전라도 사람 따라 서울이고 어디고 막 번져 나가서 홍어애국은 오히려 흔한 음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확히 그 맛을 내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칠레산 홍어까지 마구잡이로 들여와 입맛을 해치는 통에 옛날 홍어맛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요즘의 홍어는 기피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 홍어애국 맛이 아슴한 추억이 되어 기억의 뒷편으로 사라지고 있을 무렵에 우연히 다른 일행과 함께 진도 여행을 하게 되었다. 후배가 출타 중이어서 나 혼자 그 집을 찾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근처는 분명한데 사람들 말로는 원래 이 근처에는 전혀 밥집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읽은 단편소설 중의 '파란 대문집' 이야기 같았다. 우연히 파란 대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부드러운 잔디가 깔려 있고 소녀가 살고 있고 황금색 사자도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 곳에서 꿈같은 오후를 보내고 다음에 또 다시 찾아갔지만 평생 그 집을 다시 찾지 못했다더니 내가 필시 그 꼴이었다.

 

 그 집을 다시 찾으면 절대 그 집을 떠나지 않겠다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인생 만사가 그러하듯 어쩐지 아쉽고 꿈 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후배에게 물으니 '아마 그 아짐 장사 그만뒀을껄요'라는 심드렁한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아무튼 그 날 아침이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문제는 시골도 일요일이면 거의 모든 밥집이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군청 앞에서 몇 군데를 돌아다녀 봤는데 다 문이 닫혀있고 늦게라도 열지 않는지 옆집 사람에게 물었더니 '주인 양주가 다 등산을 가서 저녁 늦게야 온다'는 대답이었다.

 

 진도읍을 시골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의문이지만, 시골사람들이 일요일이면 등산을 간다는 말은 얼핏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사는 곳 자체가 산이고 물이고 바다인데 또 새삼 어디를 간다는 말인고.

 

 배도 잔뜩 고팠고 또 어딘가는 한 군데 쯤 꼭 문을 연 곳이 있으리라는 신념을 갖고서 우리는 골목 안까지 끈질기게 밥집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우리가 찾은 곳은 밥집이라기보다는 선술집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것도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문을 걸어 잠그고 주인 아주머니가 김치를 담그고 있는 집이었다.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파 만약에 거절하면 주인을 밀치고서 김치 한 가닥이라도 뺏어 먹야 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있는대로 아무 거나 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행주치마에 손을 씻으며 '정말 있는 것은 밥밖에 없다'며 의외로 미안해하면서 쩔쩔매기까지 하였다.

 

 '밥밖에 없다'는 말은 우리에게 거의 구원에 가까운 말이었다. 왜냐하면 저기 저 커다란 고무 함지에 가득히 쌓여서 젓갈 내를 솔솔 풍기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김치였던 까닭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부러 김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밥, 밥이면 된다고 했다. 밥만 달라고 했다.

 

 "으짜까요, 반찬이 아무껏도 업는디.. 저 김치는 집에서 먹을라고 아무렇게나 담근 것인디... 저 김치에라도 드실라요?" 저 김치라니. 우리는 거의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아주머니는 서둘러 밥을 푸고 새로 비빈 김치를 쭉쭉 찢어서 상 위에 내놓았다.

 

 일행은 많고 상은 좁아서 우리는 그냥 서서 먹었다. 일요일 우리는 머나먼 진도에까지 가서 어느 허름한 선술집에서 빌어먹는 놈들처럼 선 채로 허겁지겁 아침 한 끼를 때웠다. 그러나 그날 아침 그 한 끼를 어찌 기름지고 사치스러운 농어회 따위와 맞바꾸랴. 좌우간 우리는 홍어앳집을 찾지 못한 분풀이를 그 선술집에서 원 없이 하고야 말았다.

 

 그 집 또한 '파란색 대문'처럼 두 번 찾기 어려울 뿐더러 일부러 두 번 찾는 그런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