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찰이 끝나자 의사는 시계를 보았다. 아내는 남편에게 그가 뭐라고 말해도 오늘은 유명한 의사가 와 주기로 했으므로 지금 이 의사와 함께 다 함께 모여 병세를 의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발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마세요. 이건 저 때문에라도 서두르는 거에요."
아내는 비꼬듯이 말했다. 이건 모두 그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이런 그녀의 순수한 목적을 생각해서라도 남편이 반대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잠자코 있었다. 그는 자기를 둘러싼 허위가 이젠 결코 구별해낼 수 없으리만큼 뒤범벅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열 한 시 반이 되자 정말 그 유명하다는 의사가 찾아왔다. 또다시 청진을 하고, 환자 앞에서 혹은 옆방에서 신장이니 맹장이니 하는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과거와 똑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에게 묻고 대답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또 한 번 삶과 죽음이라는, 이제는 그의 앞에 놓인 유일한 현실 문제 앞에 맹장과 신장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의사가 집중 공격을 가해 그들, 삶과 죽음과 맹장과 신장을 설득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유명한 의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러나 별로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듯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 이반 일리이치가 공포와 희망으로 빛나는 눈을 들어 회복할 가능성이 있느냐고 머뭇거리며 묻자, 그는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대답했다.
이반 일리이치가 간절하게 희망을 담아 의사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너무도 비참해서, 그것을 본 아내는 의사에게 왕진비를 주려고 밖으로 나가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사의 방문으로 일시 원기가 회복된 듯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여전히 같은 방, 같은 그림, 같은 커튼, 벽지, 약병, 그리고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자신의 육체. 이윽고 이반 일리이치가 앓는 소리를 내자 주사 바늘을 찔러넣었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황혼이 짙어지고 있었다. 식사가 들어왔다. 그는 힘을 들여 고기 수프를 마셨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곱 시에 아내가 그의 방으로 왔다. 야유회에 나가는 듯한 옷차림으로 탐스러운 가슴을 불룩 내밀고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했다. 그녀는 이미 오전에 극장에 간다는 얘기를 그에게 미리 해놓았다. 사라 베르날 극단이 와 있어서 그녀는 그가 예약해 놓으라던 좌석의 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외출 차림은 그에게 극심한 모욕감을 주었다. 그러나 곧 아이들의 교육에도 좋고, 흥미 있는 오락거리이기도 하니 좌석을 예약하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는 모욕감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아내는 흐믓하지만 어딘지 미안해 하는 표정으로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곁에 앉아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질문이 형식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병세를 안다고 해도 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렇게 물을 뿐이다.
그녀는 미리 준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좌석을 이미 예약해둔 데다, 헬렌도 가고 딸과 페트리시체프(사위가 될 예심판사)도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당신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지만, 그러나 자기가 없더라도 당신은 만사를 의사의 지시대로 잘 하시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저 후요돌 페트리시체프(사윗감)도 이리 오고 싶어하던데 오라고 할까요? 리쟈도 함께요."
"오라고 하구려."
화려하게 치장한 딸은 몸의 선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육체야말로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힘있고 건강이 넘치는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사랑의 즐거움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행복에 장애가 되는 병이나 거기 따르는 고통, 죽음 따위는 그녀에게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분노의 대상일 뿐이다.
연미복 차림의 후요돌 페트로비치도 눈이 부시게 하얀 칼라로 길고 굳센 목을 감싸고 넓은 가슴을 쫙 펴고 들어왔다. 그는 검은 바지를 입고 탄력이 넘치는, 기운 찬 발걸음으로 한 손에 꼭 맞는 흰 장갑을 끼고 오페라 모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새 중학생 교복을 입은 아들도 들어왔다. 가엾게도 눈 밑에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 멍이 생긴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아들이 그는 항상 가여웠다. 그 놀란 듯한, 측은해 하는 눈이 두려운 표정을 담고 있다. 게라심을 제외하고는 이 아들만이 자신을 이해하고 마음 아프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았다.
일행은 자리에 앉아 또 한 번, 좀 어떠시냐고 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리자가 제 어머니에게 오페라 안경을 어디다 두었느냐고 물었다. 그것을 누가 어디에 두었느냐를 놓고 어머니와 딸은 말다툼을 벌렸다. 분위기가 불쾌해졌다.
후요돌 페트로비치는 느닷없이 이반 일리이치에게 사라 베르날 극단 공연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했으나 이내 대답했다.
"아니. 자네는 본 적이 있나?"
"네. 학생 때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그 여배우는 그 역을 맡을 때가 가장 멋지다고 했다. 딸이 거기 대해 반박했다. 곧 그 유명한 여배우의 연기에 대한, 틀에 박힌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야기 도중에 후요돌 페트로비치는 힐끗 이반 일리이치를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힐끔 보고는 이야기를 뚝 그쳤다. 이반 일리이치가 그들을 노여움에 가득 차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방 안의 분위기는 극도로 무거워졌다. 그러나 아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려야 했으나 아무도 선뜻 그렇게 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모두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 형식적인 평형이 깨져 제각기 마음 속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면 어쩌나 하고...
리자가 제일 먼저 결심했다. 그녀는 침묵을 깨뜨렸다. 그녀는 모두가 느끼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는 것을 마침내 입 밖에 쏟아 놓았다.
"이제 극장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요."
그녀는 아버지가 선물한, 자기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남들은 알아 보지도 못할, 자기들만이 아는 어떤 의미가 담긴 미소를 약혼자에게 보냈다. 그녀는 옷 스치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이반 일리이치는 갑자기 기분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 허위가 사라진 것이다 - 그것은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고통은 남았다. 전과 다름없는 고통, 다름없는 공포가 더 무거워지지도 가벼워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남은 것이다. 다만 더 악화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게라심 보고 들어오라고 그래라." 그는 옆에 서 있는 하인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