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통

그 멋없이 넓고 또 쓸쓸한 길을 아무렇게나 걸어가며, 문득 자기는, 혹은 위선자나 아니었었나 하고 구보는 생각하여 보낟. 그것은 역시 자기의 약한 기질에 근원할게다. 아아, 온갖 악은 인성(人性)의 약함에서, 그리고 온갖 불행이...

또다시 너무나 가엾은 여자의 뒷모양이 보였다. 레인코트 위에 빗물은 흘러내리고 우산도 없이 모자 안 쓴 머리가 비에 젖어 애달프다. 기운 없이, 기운 있을 수 없이 축 늘어진 두 어깨. 주머니에 두 팔을 꽂고, 고개 숙여 내어 디디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에 두 팔을 꽂고, 고개 숙여 내어 디디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조그맣고 약한 발에 아무러한 자신도 없다.

뒤따라 그에게로 달려가야 옳았다. 달려들어 그의 조그만 어깨를 으스러지라 잡고, 이제까지 한 나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나는 결코 이 사랑을 단념할 수 없노라고, 이 사랑을 위하여는 모든 장애와 싸워 가자고, 그렇게 말하고 그리고 이슬비 내리는 동경거리에서 두 사람은 무한한 감격에 울었어야만 옳았다.

구보는 발 앞의 조약돌을 힘껏 찼다. 격렬한 감정을, 진정할 욕구를, 힘써 억제할 수 있었다는 데서 그는 값없는 자랑을 얻으려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 한 개 비극이 우리들 사랑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려 들었던 자기. 순간에 또 벗의 선량한 두 눈을 생각해 내고 그의 원만한 천성과 또 금력이 여자를 행복하게 하여 주리라 믿으려 들었던 자기.

그 왜곡된 감정이 구보의 진정한 마음의 부르짖음을 틀어막고야 말았다. 그것은 옳지 않았다. 구보는 대체 무슨 권리를 가져 여자의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농락하였나, 진정으로 여자를 사랑하였으면서도 자기는 결코 여자를 행복하게 하여 주지는 못할 게라고, 그 부전감(不全感)이 모든 사람을, 더욱이 가엾은 애인을 참말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그 길 위에 깔린 무수한 조약돌을, 힘껏 차 흩트리고, 구보는 아아, 내가 그릇하였다, 그릇하였다.

철겨운 봄 노래를 부르며, 열 살이나 그밖에 안된 아이가 지나갔다. 아이에게 근심은 없다. 잘 안 돌아가는 혀끝으로, 술 주정꾼이 두 명, 어깨동무를 하고 수심가를 불렀다. 그들은 지금 만족이다. 구보는 문득 광명을 찾은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어두운 거리 위에 걸음을 멈춘다. 이제 그와 다시 만날 때, 나는 이미 약하지 않다... 그러나 그를 어디가 찾누. 어허, 공허하고 또 암담한 사상이여.

이 넓고 또 훠엉한 광화문 거리 위에서, 한 개의 사나이 마음이 이렇게도 외롭고 또 가엾을 수 있었나. 각모 쓴 학생과 젊은 여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구보 앞을 지나갔다. 그들의 걸음걸이에는 탄력이 있었고, 그들의 말소리는 은근하였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대들 사랑에 언제든 다행한 빛이 있으라. 마치 자애 깊은 부로(父老)와 같이 구보는 너그러웁고 사랑 가득한 마음을 가져 진정으로 그들을 축복하여 준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을 잊은 듯이, 그러할 필요가 없어진 듯이. 얼마 동안을 구보는 그곳에가 망연히 서 있었다. 가엾은 애인. 이 작품의 결말은 이대로 좋은 것일까. 이제 뒷날 그들은 다시 만나는 일도 없이, 옛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질 뿐으로, 언제든 외롭고 또 애달퍼야만 할 것일까.

그러나 그 즉시 아아, 생각을 말리라. 구보는 의식하여 머리를 흔들고 그리고 좀 급한 걸음걸이로 온 길을 되걸어갔다. 그래도 마음에 아픔은 그저 있었고, 고래 숙여 걷는 길 위의, 발에 채이는 조약돌이 회상의 무수한 파편이다. 머리를 들어 또 한 번 뒤흔들고, 구보는 참말 생각을 말리라, 말리라...

이제 그는 마땅히 다방으로 가, 그곳에서 벗과 다시 만나, 이 한밤의 시름을 덜 도리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가 채 전차 선로를 횡단하기 전에 그는 '눈깔 아저씨...'하고 불리우고 그리고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 그의 단장과 노트 든 손은 아이들의 조그만 손에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