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을, 생활을 가진 온갖 사람들의 발끝은 이 거리 위에서 모두 자기네들 집으로 향하여 놓여 있었다. 집으로 집으로, 그들은 그들의 만찬과 가족의 얼굴과 또 하루 고역 뒤의 안위를 찾아 그렇게도 기꺼이 걸어가고 있다. 문득 저도 모를 사이에 구보의 입술을 새어나오는 탁목(啄木의) 단가...

'누구나 모다 집 가지고 있다는 애달픔이여
무덤에 들어가듯
돌아와서 자옵네'

그러나 구보는 그러한 것을 초저녁의 거리에서 느낄 필요는 없다. 아직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좋았다. 그리고 좁은 서울이었으나, 밤늦게까지 헤맬 거리와, 들를 처소가 구보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대체 누구와 이 황혼을... 구보는 거의 자신을 가지고 걷기 시작한다. 벗이 있다. 황혼을, 또 밤을 같이 지낼 벗이 구보에게 있다. 종로 경찰서 앞을 지나 하얗고 납작한 조그만 다료(茶寮)엘 들른다.

그러나 주인은 없었다. 구보가 다시 문으로 향하여 나오면서, 왜 자기는 그와 미리 맞추어 두지 않았던가 뉘우칠 때, 아이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곧 돌아오신다구요, 누구 오시거든 기다리시라구요, '누구'가 혹은 특정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벗은 혹은, 구보와 이제 행동을 같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은 언제든 희망을 가져야 하고, 달리 찾을 벗을 갖지 아니한 구보는 하여튼 이제 자리에 앉아 돌아올 벗을 기다려야 한다.

여자를

동반한 청년이 축음기 놓여 있는 곳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노는 계집 아닌 여성과 그렇게 같이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에 득의와 또 행복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육체는 건강하였고 또 그의 복장은 화미(華美)하였고 그리고 그의 여인은 그에게 그렇게도 용이하게 미소를 보여 주었던 까닭에, 구보는 그 청년에게 엷은 질투와 선망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뿐 아니다. 그 청년은 한 개의 인단 용기(仁丹 容器)와 로도 목약(目藥)을 가지고 있는 것에조차 철없는 자랑을 느낄 수 있었던 듯 싶었다. 구보는 제 자신 포용력을 가지고 있는 듯 싶게 가장하는 일 없이, 그의 명랑성에 참말 부러움을 느낀다.

그 사상에는 황혼의 애수와 또 고독이 혼화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보는 극히 음울할 제 표정을 깨닫고 그리고 이 안에 거울이 없음을 다행하여 한다. 일찍이 어느 시인이 구보의 이 심정을 가르쳐 독신자의 비애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언뜻 그러한 듯 싶으면서도 옳지 않았다.

구보가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 하지 않고, 때로 좋은 벗의 우정에 마음을 의탁하려 한 것은 제법 오랜 일이다. 어느 틈엔가 그 여자와 축복 받은 젊은이는 이 안에서 사라지고, 밤은 완전히 다료 안팎에 왔다.

이제 어디로 가나, 문득 구보는 자기가 그동안 벗을 기다리면서도 벗을 잊고 있었던 사실에 생각이 미치고 그리고 호젓한 웃음을 웃었다. 그것은 일찍이 사랑하는 여자와 마주 대하여 권태와 고독을 느끼었던 것보다도 좀더 애처로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구보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참 그는 그 뒤 어찌 되었을구. 비록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추억을 갖는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또 기쁘게 하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