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이 가을이다. '간다(神田)' 어느 철물전에서 한 개의 '네일 클립퍼'를 구한 구보는 '짐보정(神保町)', 그가 가끔 드나드는 끽다점을 찾았다. 그러나 유식을 위함도 차를 먹기 위함도 아니었던 듯싶다. 오직 오늘 새로 구한 것으로 손톱을 깎기 위하여서 만인지도 몰랐다.

그 중 구석진 테이블, 그 중 구석진 의자. 통속 작가들이 즐겨 취급하는 종류의 로맨스의 발단이 그곳에 있었다. 광선이 잘 안 들어오는 그곳 마룻바닥에서 구보의 발길에 채인 것. 한 권 대학 노트에는 '윤리학' 석자와' 임(姙)'자가 든 성명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죄악일 게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그만한 호기심은 허락되어도 좋다. 그래도 구보는 다른 좌석에서 잘 안 보이는 위치에 노트를 놓고, 그리고 손톱을 깎을 것도 잊고 있었다.

제 1 장 서론. 제 2 절 윤리학의 정의. 2. 규범과학. 제 2 장 본론. 도덕 판단의 대상. C 동기설과 결과설. 예 1. 빈가(貧家)의 자손이 효양(孝養)을 위해서 절도함. 2.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선 사업. 제 2 학기. 3. 품성 형성의 요소. 1. 의지 필연론...

그리고 여백에 연필로, '그러나 수치심은 사랑의 상상 작용에 조력을 준다. 이것은 사랑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스탕달의 <연애론>의 일절, 그리고는 연락 없이, <서부전선 이상 없다> 길옥신자(吉屋信子). 개천룡지개(芥川龍之介). 어제 어디 갔었니. <라부 파레드>를 보았니...

이런 것들이 쓰여 있었다. 다료의 주인이 돌아왔다. 아 언제 왔고. 오래 기다렸소. 무슨 좋은 소식 있소. 구보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와 단장을 집어들고, 저녁 먹으러 나갑시다. 그리고 속으로 지난날의 조그만 로맨스를 좀더 이어 생각하려 한다.

다료(茶寮)에서

나와 벗과 대창옥(大昌屋)으로 향하며, 구보는 문득 대학 노트 틈에 끼어 있었던 한 장의 엽서를 생각하여 본다. 물론 처음에 그는 망설거렸었다. 그러나 여자의 숙소까지를 알 수 있었으면서도 그 한 기회에서 몸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우선 젊었고 또 그것은 흥미 있는 일이었다.

소설가다운 온갖 망상을 즐기며, 이튿날 아침 구보는 이내 이 여자를 찾았다. 우입구 시래정(牛 區 矢來町). 주인집은 그의 신조사(新潮社) 근처에 있었다. 인품이 좋은 주인 여편네가 나왔다 들어간 뒤, 현관에 나온 노트 주인은 분명히...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쪽에서 미인이 왔다. 그들은 보고 빙그레 웃고 그리고 지났다. 벗의 다료 옆, 카페 여급. 벗이 돌아보고 구보의 의견을 청하였다. 어때 예쁘지. 사실 여자는, 이러한 종류의 계집으로서는 드물게 어여뻤다. 그러나 그는 이 여자보다 좀더 아름다웠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엇 옵쇼. 설렁탕 두 그릇만 주... 구보가 노트를 내어놓고, 지기의 실례에 가까운 심방(尋訪)에 대한 변해(辨解)를 하였을 때, 여자는 순간에 얼굴이 붉어졌었다. 모르는 남자에게 정중한 인사를 받은 까닭만이 아닐 게다. 어제 어디 갔었니. 길옥신자(吉屋信子). 구보는 문득 그런 것들을 생각해 내고, 여자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벗은 숟가락 든 손을 멈추고 빤히 구보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물었는지도 모른다. 구보는 생각의 비밀을 감추기 위하여 의미 없이 웃어 보였다.

좀 올라오세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였었다. 말로는 태연하게, 그러면서도 그의 볼은 역시 처녀답게 붉어졌다. 구보는 그의 말을 쫓으려다 말고 불쑥, 같이 산책이라도 안하시렵니까, 볼일 없으시면. 일요일이었고, 여자는 마악 어디 나가려던 차(次인)지 나들이옷을 입고 있었다.

통속소설은 템포가 빨라야 한다. 그 전날, 윤리학 노트를 집어들었을 때부터 이미 구보는 한 개 통속소설의 작가였고 동시에 주인공이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여자가 기독교 신자인 경우에는 제 자신 목사의 졸음 오는 설교를 들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는 또 한 번 얼굴을 붉히고 그러나 구보가 만약 볼일이 계시다면, 하고 말하였을 때, 당황하게, 아니에요, 그럼 잠깐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여자는 핸드백을 들고 나왔다. 분명히 자기를 믿고 있는 듯싶은 여자 태도에 구보는 자신을 갖고, 참, 이번 주일에 무장야관(武藏野 )도 구경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