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창 밖 길가에,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울음소리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린애의 것보다는 오히려 짐승의 소리에 가까웠다. 구보는 '율리시즈'를 논하고 있는 벗의 탁설(卓說)에는 상관없이, 대체 누가 또 최악의 자식을 났누, 하고 생각한다.

가엾은 벗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불행하였던 그는 온갖 고생을 겼지 않으면 안되었었고, 또 그렇게 경란한 사람이었던 까닭에, 벗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가장 관대한 품이 있었다. 그는 거의 구보의 친우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자로서의 가장 불행한 약점이 있었다.

그의 앞에서 구보가 말을 한다면 '다정다한(多情多恨)', 이러한 문자를 사용할게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의 수식에 지나지 않았고, 그 벗의 통제를 잃은 성 본능은 누가 보기에도 진실로 딱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구보는 왕왕, 그 벗의 여성에 대한 심미안에 의혹을 갖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고 있는 동안은 좋았다.

마침내 비극이 왔다. 그 벗은 결코 아름다웁지도 총명하지도 않은 한 여성을 사랑하고, 여자는 또 남자를 오직 하나의 사내라 알았을 때, 비극은 비롯한다. 여자가 어느 날 저녁 남자와 마주 앉아 얼굴조차 붉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홀몸이 아님을 고백하였을 때, 남자는 어는 틈엔가 그 여자에게 대하여 거의 완전히 애정을 상실하고 있었다.

여자는 어리석게도 모성됨의 기쁨을 맛보려 하였고 그리고 남자의 사랑을 좀더 확실히 포착할 수 있을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남자는 오직 제 자신이 곤경에 빠졌음을 한(恨하)고 그리고 또 그 젊은 어미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던 까닭에, 좀더 그 여자를 미워하였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그러나 남자의 변심을 깨닫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들 모자를 위하여 아무러한 밝은 길도 없었다. 이미 반생을 고락을 같이 하여 온 아내가 남자에게는 있었고 또 그와 견주어 볼 때, 이 가정의 틈입자(闖入者는) 어떠한 점으로든 떨어졌다. 특히 아이와 아이를 비하여 볼 때 그러하였다.

가엾은 사생자(私生子)는 나이 분수보다 엄청나게나 거대한 체구와 또 치매적 안모(顔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오히려 좋았다. 한 번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때, 사람들은 가장 언짢고 또 야릇한 느낌을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결코 사람의 아이 울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특히 남자의 죄악에 진노한 신이, 그 아이의 비상한 성대를 빌려, 그들의, 특히 남자의 죄악을 규탄하고 또 영구히 저주하는 것인 것만 같았다.

구보는 그저 율리시즈를 논하고 있는 벗을 깨닫고, 불쑥 그야 '제임스 조이스'의 새로운 시험에는 경의를 표하여야 마땅할 게지. 그러나 그것이 새롭다는, 오직 그 점만 가지고 과중 평가를 할 까닭이야 없지. 그리고 벗이 그 말에 대하여 항의를 하려 하였을 때, 구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벗의 등을 치고, 자, 그만 나갑시다. 그들이 밖에 나왔을 때, 그곳엔 황혼이 있었다. 구보는 이 시간에, 이 거리에 맑고 깨끗함을 느끼며 문득 벗을 돌아보았다.

"이제 어디로 가."

"집으루 가지."

벗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구보는 대체 누구와 이 황혼을 지내야 할 것인가 망연해 한다.

전차를 타고

벗은 이내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집이 아니다. 여사(旅舍)였다. 주인집 식구 말고 아무도 없을 여사로, 그는 그렇게 저녁 시간에 맞추어 가야만 할까. 만약 그것이 단지 저녁밥을 먹기 위하여서의 일이라면...

"지금부터 집엘 가서 무얼 할 생각이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어리석은 물음이었다. '생활'을 가진 사람은 마땅히 제 집에서 저녁을 먹어야 할게다. 벗은 구보와 비교할 때, 분명히 생활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속무(俗務)에 헤매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는 이제 저녁 후의 조용한 제 시간을 가져, 독서와 창작에서 오는 기쁨을 찾을게다. 구보는, 구보는 그러나 요사이 그 기쁨을 못 갖는다.

어느 틈엔가,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서서, 그곳의 황혼과 또 황혼을 타고 거리로 나온 노는 계집의 무리들을 본다. 노는 계집들은 오늘도 무지를 싸고 거리에 나왔다. 이제 곧 밤은 올게요, 그리고 밤은 분명히 그들의 것이었다. 구보는 포도 위에 눈을 떨어뜨려, 그곳의 무수한, 화려한 또는 화려하지 못한 다리를 보며, 그들의 걸음걸이를 가장 위태로웁다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가 숙녀화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들 가장 서투르고 부자연한 걸음걸이를 갖는다. 그것은 역시 '위태로운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그러나 물론 그런 것을 그네 자신 깨닫지 못한다. 그들의 세상살이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누구라도 하나 인생에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무지는 거의 완전히 그 불안에서 그들의 눈을 가리어 준다. 그러나 포도를 울리는 것은 물론 그들의 가장 불안정한 구두 뒤축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