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구보는 한길 위에 서서, 넓은 마당 건너 대한문을 바라본다. 아동유원지 유동의자에라도 앉아서... 그러나 그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옛 궁전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여주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구보가 다 탄 담배를 길 위에 버렸을 때, 그의 옆에 아이가 와 선다. 그는 구보가 놓아둔 채 잊어버리고 나온 단장을 들고 있었다. 고맙다. 구보는 그렇게도 방심한 제 자신을 쓰게 웃으며, 달음질하여 다방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양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자기도 그 길을 되걸어갔다.
다방 옆 골목 안. 그곳에서 젊은 화가는 골동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구보는 그 방면에 대한 지식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하여튼, 그것은 그의 취미에 맞았고 그리고 기회 있으면 그 방면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생각한다. 온갖 지식이 소설가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나 벗은 전(廛)에 있지 않았다.
"바로 지금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둥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며,
"한 십 분, 됐을까요."
점원은 덧붙여 말하였다.
구보는 골목을 전찻길로 향하여 걸어나오며, 그 십 분이란 시간이 얼마만한 영향을 자기에게 줄 것인가, 생각한다. 한길 위에 사람들은 바쁘게 또 일 있게 오고 갔다. 구보는 포도 위에 서서, 문득 자기도 창작을 위하여 어디, 예(例)하면 서소문정 방면이라도 답사할까 생각한다.
'모데르놀지'를 게을리 하기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함께 구보는 격렬한 두통을 느끼며, 이제 한 걸음도 더 옮길 수 없을 것 같은 피로를 전신에 깨닫는다. 구보는 얼마 동안을 망연히 그곳 한길 위에 서 있었다.
얼마 있다
구보는 다시 걷기로 한다. 여름 한낮의 뙤약볕이 맨머리 바람의 그에게 현기증을 주었다. 그는 그 속에 더 그렇게 서 있을 수 없다. 신경쇠약. 그러나 물론 쇠약한 것은 그의 신경뿐이 아니다. 이 머리를 가져, 이 몸을 가져, 대체 얼마만한 일을 나는 하겠단 말인고...
때마침 옆을 지나는 장년의, 그 정력가형 육체와 탄력 있는 걸음걸이에 구보는 일종 위압조차 느끼며, 문득 아홉 살 적에 집안 어른의 눈을 기어 춘향전을 읽었던 것을 뉘우친다. 어머니를 따라 일갓집에 갔다 와서, 구보는 저도 얘기책이 보고 싶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것을 금했다.
구보는 남몰래 안짬재기에게 문의하였다. 안짬재기는 세책(貰冊)집에는 어떤 책이든 있다는 것과, 일 전이면 능히 한 권을 세내올 수 있음을 말하고, 그러나 꾸중들우... 그리고 다음에, 재미있긴 춘향전이 제일이지, 그렇게 그는 혼잣말을 하였었다. 한 분(分의) 동전과 한 개의 주발 뚜껑, 그것들이 17년 전의 그것들이, 뒤에 온 그리고 또 올, 온갖 것의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전에 읽던 얘기책들, 밤을 새워 읽던 소설책들. 구보의 건강은 그의 소년 시대에 결정적으로 손상되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변비(便秘), 뇨의 빈수(尿意 頻數), 피로(疲勞), 권태(倦怠), 두통(頭痛), 두중(頭重), 두압(頭壓), 삼전정마(三田正馬) 박사의 단련요법(鍛鍊療法)... 그러한 것은 어떻든 보잘것없는, 아니, 그 살풍경하고 또 어수선한 태평통(太平通)의 거리는 구보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그는 저 불결한 고물상들을 어떻게 이 거리에서 쫓아 낼 것인가를 생각하며, 문득 반자의 무늬가 눈에 시끄럽다고, 양지(洋紙)로 반자를 발라 버렸던 서해(曙海) 역시 신경쇠약이었음에 틀림없었다고, 이름 모를 웃음을 입가에 띄어 보았다. 서해의 너털웃음. 그것도 생각하여 보면, 역시 공허한, 적막한 음향이었다.
구보는 고인에서 받은 <홍염(紅焰)>을, 이제껏 한 페이지도 들쳐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내고 그리고 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읽지 않은 것은 오직 서해의 작품뿐이 아니다. 독서를 게을리하기 이미 3년. 언젠가 구보는 지식의 고갈을 느끼고 악연(愕然)하였다.
갑자기 한 젊은이가 구보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구보가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곳에서 왔다. 구보는 그를 어디서 본듯 싶었다. 자기가 마땅히 알아보아야만 할 사람인듯 싶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거리가 한 칸통으로 단축되었을 때, 문득 구보는 어린 시절. 그리운 옛 동무.
그들은 보통학교를 나온 채 이제도록 한 번도 못 만났다. 그래도 구보는 그 동무의 이름까지 기억 속에서 찾아낸다. 그러나 옛 동무는 너무나 영락하였다. 모시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 오직 새로운 맥고 모자를 쓴 그의 행색은 너무나 초라하다.
구보는 망설거린다. 그대로 모른 체하고 지날까. 옛동무는 분명히 자기를 알아본 듯 싶었다. 그리고 구보가 자기를 알아볼 것을 두려워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마침내 두 사람 서로 지나치는, 그 마지막 순간을 포착하여 구보는 용기를 내었다.
"이거 얼마만이야, 유군."
그러나 벗은 순간에 약간 얼굴조차 붉히며,
"네, 참 오래간만입니다."
"그 동안 서울에, 늘 있었어?"
"네."
구보는 다음에 간신히,
"어째서 그렇게 뵈올 수 없었어요?"
한마디를 하고 그리고 서운한 감정을 맛보며 그래도 또 무슨 말이든 하고 싶다 생각할 때, 그러나 벗은, 그만 실례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리고 구보의 앞을 떠나 저 갈 길을 가버린다. 구보는 잠깐 그곳에 섰다가 다시 고개 숙여 걸으며 울 것 같은 감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