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로 향하여 걸어가며,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네'하고 대답 못했던 것을 뉘우쳐 본다. 하기야 중문을 여닫으며 구보는'네' 소리를 목구멍까지 내어 보았던 것이나, 중문과 안방과의 거리는 제법 큰소리를 요구하였고 그리고 공교롭게 활짝 열린 대문 앞을, 때마침 세 명의 여학생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
그렇더라도 대답은 역시 하여야만 하였었다고, 구보는 어머니의 외로워할 때의 표정을 눈앞에 그려본다. 처녀들은 어느 틈엔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구보는 마침내 다리 모퉁이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일 있는 듯 싶게 꾸미는 걸음걸이는 그곳에서 멈추어진다.
그는 어딜 갈까 생각하여 본다. 모두가 그의 갈 곳이었다. 한군데라도 그가 갈 속은 없었다. 한낮의 거리 위에서 구보는 갑자기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비록 식욕은 왕성하더라도, 잡은
잘 오더라도, 그것은 역시 신경쇠약에 틀림없었다. 구보는 떠름한 얼굴을 하여 본다.
취박(臭剝) 4.0
취나(臭那) 2.0
취안(臭安) 2.0
고정(苦丁) 4, 0
수(水) 200.0
1일 3회 분복(分服) 2일분
그가 다니는 병원의 젊은 간호부가 반드시 '3삐스이'라고 발음하는 이 약은 그에게는 조그마한 효험도 없었다.
구보는 갑자기 옆으로 몸을 비킨다. 그 순간 자전거가 그의 몸을 가까스로 피하여 지났다. 자전거 위의 젊은이는 모멸 가득한 눈으로 구보를 돌아본다. 그는 구보의 몇 칸 통 뒤에서부터 요란스리 종을 울렸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위험이 박두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그가 '3삐스이'의 처방을 외우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구보는, 자기의 왼편 귀 기능에 스스로 의혹을 갖는다. 병원의 젊은 조수는 결코 익숙하지 못한 솜씨로 그의 귓속을 살피고, 그리고 대담하게도 그 안이 몹시 불결한 까닭 외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선언하였었다. 한 덩어리의 '귀지'를 갖기보다는 차라리 4주일간 치료를 요하는 중이염을 앓고 싶다 생각하는 구보는, 그의 선언에 무한한 굴욕을 느끼며, 그래도 매일 신경질 나게 귀 안을 소제하였었다.
그러나 구보는 다행하게도 중이질환(中耳疾患)을 가진 듯 싶었다. 어느 기회에 그는 의학사전을 뒤적거려 보고, 그리고 별 까닭도 없이 자기는 중이가답아(中耳加答兒))에 걸렸다고 혼자 생각하였다. 사전에 의하면 중이가답아에는 급성 및 만성이 있고, 만성 중이가답아에는 또다시 이를 만성건성(慢性乾性) 및 만성습성(慢性濕性)의 이자(二者)로 나눈다 하였는데, 자기의 이질은 그 만성습성의 중이가답아에 틀림없다고 구보는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실한 것은 그의 왼쪽 귀뿐이 아니었다. 구보는 그의 바른쪽 귀에도 자신을 갖지 못한다. 언제든 수이 전문의를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1년이나 그대로 내버려둔 채 지내온 그는, 비교적 건강한 그의 바른쪽 귀마저 또 한편 귀의 난청 보충으로 그 기능을 소모시키고, 그리고 불원한 장래에 '듄케르 청장관(聽長管)' 이나'전기 보청기'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구보는
갑자기 걸음을 걷기로 한다. 그렇게 우두커니 다리 곁에가 서 있는 것의 무의미함을 새삼스러이 깨달은 까닭이다.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는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나 내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질러 지난다. 구보는 그 사나이와 마주칠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위태롭게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구보는 이렇게 대낮에도 조금의 자신도 가질 수 없는 자기의 시력을 저주한다. 그의 코 위에 걸려 있는 24도의 안경은 그의 근시를 도와주었으나, 그의 망막에 나타나 있는 무수한 맹점을 제거하는 재주는 없었다. 총독부 병원 시대의 구보의 시력 검사표는 그저 그 우울한 '안과 재래'의 책상 서랍 속에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R, 4 L, 3
구보는 2주일 간 열병을 앓은 끝에, 갑자기 쇠약해진 시력을 호소하러 처음으로 안과의와 대하였을 때의, 그 조그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시야 측정기'를 지금 기억하고 있다. 제 자신 강도의 안경을 쓰고 있던 의사는, 백묵을 가져와, 그 위에 용서 없이 무수한 맹점을 찾아내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