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 전방한 지 아마 이십 일은 지나서 벌써 다알리아 철도 거의 지나고 국화꽃이 피기 시작한 어떤 날, 나는 정과 함께 감옥 마당에 운동을 나갔다. 정은 사루마다 바람으로 달음박질을 하고 있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나는 모래 위에 엎드려서 거진 다 쇠잔한 채송화 꽃을 들여다보며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아침 저녁은 선들선들하고, 더구나 오늘 아침에는 늦게 핀 코스모스조차 서리를 맞아 아주 후줄근하였건마는 오정을 지난 빛은 따가울 지경이었다. 이때에 “진상”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일방 창으로 윤의 머리가 쑥 나와 있었다. 그 얼굴은 누르스름하게 부어올라서 원래 가느다란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나는 약간 고개를 끄덕여서 인사를 대신하였으나, 이것도 물론 법에 어그러지는 일이었다. 파수 보는 간수에게 들키면 걱정을 들을 것은 물론이다.
“진상! 저는 꼭 죽게 됐는 게라. 이렇게 얼굴까지 퉁퉁 부었능기라우. 어젯밤 꿈을 꾸닝게 제가 누런 굵은 베로 지은 제복을 입고 굴건을 쓰고 종로로 돌아다니는 꿈을 꾸었지라오. 이게 죽을 꿈이 아닝기오?”
하는 그 목소리는 눈물겹도록 부드러웠다.
그 이튿날이라고 생각한다. 또 나와 정이 운동을 하러 나와 있을 때에 전날과 같이 윤은 창으로 내다보며,
“당숙한테서 돈이 왔는디 달걀을 먹을 겡기오? 우유를 먹을 겡기오? 아무 걸 먹어도 도무지 내리지를 않는디.”
하고 말하였다.
또 며칠 후에는,
“오늘 의사의 말이 절더러 집안에 부어서 죽은 사람이 없느냐고 묻는데요, 선친이 꼭 나 모양으로 부어서 돌아가셨는디.”
이런 말을 하고 아주 절망하는 듯이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서 정에게는 들리지 않기를 원하는 듯이 정이 저쪽 편으로 가는 때를 타서,
“염불을 뫼시려면 나무아미타불이라고만 하면 되능기요?”
하고 물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합장하고 약간 고개를 숙이고 나무아미타불 하고 한번 불러 보였다.
윤은 내가 하는 모양으로 합장을 하다가, 정이 앞에 오는 것을 보고 얼른 두 팔을 내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정이 먼 곳으로 간 때를 타서,
“진상!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죽어서 분명히 지옥으로 안가고 극락세계로 가능기요?”
하고 그 가는 눈을 할 수 있는 대로 크게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생전에 이렇게 중대한, 이렇게 책임 무거운 질문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기실 나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히 대답할 만한 자신이 없었건마는 이 경우에 나는 비록 거짓말이 되더라도, 나 자신이 지옥으로 들어갈 죄인이 되더라도 주저할 수는 없었다. 나는 힘있게 고개를 서너 번 끄덕끄덕한 뒤에,
“정성으로 염불을 하세요. 부처님의 말씀이 거짓말 될 리가 있겠읍니까?”
하고 내가 듣기에도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엄청나게 결정적으로 대답을 하였다.
윤은 수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를 향하여 크게 한번 허리를 구부리고는 창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윤이 우유와 달걀을 주문하는 소리와 또 며칠 후에는 우유도 내리지 아니하니 그만두라는 소리가 들리고, 이 모양으로 어쩌다가 한 마디씩 그가 점점 쇠약하여 가는 것을 표시하는 말소리가 들렸을 뿐이오, 우리가 운동을 나가더라도 그가 창으로 우리를 내다보는 일은 없었다. 간병부의 말을 듣건댄 그의 병 증세는 점점 악화하여 근일에는 열이 삼십 구 도를 넘는다 하고, 의사도 이제는 절망이라고 해서 아마 미구에 보석이 되리라고 하였다.
어느 날 밤, 취침 시간이 지난 뒤에 퉁퉁 하고 복도로 사람들 다니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뚱뚱한 부장과 얼굴 검은 간수가 어떤 회색 두루마기 입은 사람과 같이 윤이 있는 일방 문 밖에 서 있고 얼마 아니해서 흰 겹바지저고리를 갈아입은 윤이 키 큰 간병부의 부축을 받아 나가는 것이 보였다. 키 작은 간병부는 창에 붙어 섰다가 자리에 와 드러누우며,
“그예, 보석으로 나가는군요. 나가더라도 한달 넘기기가 어려우리라든데요.”
하였다.
그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윤의 당숙 면장일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도 보석이나 나갔으면!”
하고 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출옥한 뒤에 석 달이나 지나서 가출옥으로 나온 키 작은 간병부를 만나 들은 바에 의하면, 민도 죽고, 윤도 죽고, 강은 목수 일을 하고 있고, 정은 소화불량이 더욱 심하여진 데다가 신장염도 생기고 늑막염도 생겨서 중병 환자로 본감 병감에 가 있는데, 도저히 공판정에 나가 설 가망이 없다고 한다.
<끝>
무명 - 14. 국화꽃이 피기 시작한 날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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