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에 윤과 나와 단둘이 있게 되어서부터는 큰소리가 날 필요가 없었다. 밤이면 우리 방에 들어와 자는 간병부가 윤을 윤 서방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윤이 대단히 불평하였으나 간병부의 감정을 상하는 것이 이롭지 못한 줄을 잘 아는 윤은 간병부와 정면충돌을 하는 일은 별로 없고 다만 낮에 나하고만 있을 때에,
“서울말로는 무슨 서방이라고 부르는 말이 높은 말잉기오? 우리 전라도서는 나 많은 사람보고 무슨 서방이라고 하면 머슴이나 하인이나 부르는 소리랑기오.”
하고 곁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가 묻는 뜻을 알았으므로 대답하기가 심히 거북살스러워서 잠깐 주저하다가,
“글쎄 서방님이라고 하는 것만 못하겠지요.”
하고 웃었다. 윤은 그제야 자신을 얻은 듯이,
“그야 우리 전라도에서도 서방님이라고 하면사 대접하는 말이지요. 글쎄, 진상도 보시다시피 저 간병부 놈이 언필칭 날더러 윤 서방, 윤 서방 하니, 그래 그놈의 자식은 제 애비나 아재비더러도 무슨 서방 무슨 서방 할 텐가? 나이로 따져도 내가 제 애비뻘은 되렷다. 어 고약한 놈 같으니.”
하고 그 앞에 책망 받을 사람이 섰기나 한 것처럼 뽐낸다.
윤씨는 윤 서방이라는 말이 대단히 분한 모양이어서 어떤 날 저녁엔 간병부가 들어올 때에도 눈만 흘겨보고 잘 다녀왔느냐 하는 늘 하던 인사도 아니하는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 저녁에는 또 “윤 서방”이라고 간병부가 부른 것을 기회로 마침내 정면충돌이 일어나고 말았다. 윤이,
“댁은 나를 무어로 보고 윤 서방이라고 부르오?”
하는 정식 항의에 간병부가 뜻밖인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한참이나 윤을 바라보고 앉았더니, 허허 하고 경멸하는 웃음을 웃으면서,
“그럼 댁더러 무어라고 부르라는 말이오? 댁의 직업이 도장쟁이니, 도장쟁이라고 부르라는 말이오? 죄명이 사기니 사기쟁이라고 부르라는 말이오? 밤낮 똥질만 하니 윤 똥질이라고 부르라는 말이오? 옳지 윤 선생이라고 불러줄까? 왜 되지 못하게 이 모양이야? 윤 서방이라고 불러주면 고마운 줄이나 알지. 낫살을 먹었으면 몇 살이나 더 먹었길래. 괜스리 그러다가는 윤가 놈이라고 부를걸.”
하고 주먹으로 삿대질을 한다.
윤은 처음에 있던 호기도 다 없어지고 그만 수그러지고 말았다. 간병부는 민 영감 모양으로 만만치 않은 것도 있거니와 간병부하고 싸운댔자 결국은 약 한 봉지 얻어먹기도 어려운 줄을 깨달은 것이었다.
윤은 침묵하고 있건마는 간병부는 누워 잘 때에까지도 공격을 중지하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아침, 진찰도 다 끝나고 난 뒤에 우리 방에 있는 키 큰 간병부는 다음 방에 있는 간병부를 데리고 와서,
“흥, 저 양반이, 내가 윤 서방이라고 부른다고 아주 대노하셨다나.”
하며 턱으로 윤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키 작은 간병부가,
“여보! 윤 서방. 어디 고개 좀 이리 돌리오. 그럼 무어라고 부르리까, 윤 동지라고 부를까? 윤 선달이 어떨꼬? 막 싸구려판이니 어디 그 중에서 맘에 드는 것을 고르시유.”
하고 놀려먹는다.
윤은 눈을 깜박깜박하고 도무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본래 간병부에게 호감을 못 주던 윤은 윤 서방 사건이 있은 뒤부터 더욱 미움을 받았다. 심심하면 두 간병부가 와서 여러가지 별명을 부르면서 윤을 놀려먹었고, 간병부들이 간 뒤에는 윤은 나를 향하여,
“두 놈이 옥속에서 썩어져라.”
하고 악담을 퍼부었다.
이렇게 윤이 불쾌한 그날그날을 보낼 때에 더욱 불쾌한 일 하나가 생겼다. 그것은 정이라는 역시 사기범으로 일동 팔방에서 윤하고 같이 있던 사람이 설사병으로 우리 감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윤에게서 정씨의 말을 여러번 들었다. 설사를 하면서도 우유니 달걀이니 하고 막 처먹는다는 둥, 한다는 소리가 모두 거짓말뿐이라는 둥, 자기가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는 꼭 막힌 놈이라는 둥, 이러한 비평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하루는 윤하고 나하고 운동을 나갔다가 들어와 보니 웬 키가 커다랗고 얼굴이 허연 사람이 똥통을 타고 앉아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윤은 대단히 못마땅한 듯이 나를 돌아보고 입을 삐죽하고 나서 자리에 앉아서 부채를 딱딱거리면서,
“데이상, 입대까지 설사가 안 막혔능기오? 사람이란 친구가 충고하는 옳은 말은 들어야 하는 법이여. 일동 팔방에 있을 때에 내가 그만큼이나 음식을 삼가하라고 말 안했거디? 그런데 내가 병감에 온 지가 석 달이나 되는디 아직도 설사여?”
하고 똥통에 올라앉은 사람을 흘겨본다. 윤의 이 말에 나는 그가 윤이 늘 말하던 정씨인 줄을 알았다.
똥통에서 내려온 정씨는 윤의 말을 탓하지 않는, 지어서 하는 듯한 태도로,
“인상, 우리 이거 얼마만이오? 그래 아직도 예심중이시오?”
하고 얼굴 전체가 다 웃음이 되는 듯이 싱글벙글하며 윤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나서는 내게 앉은 절을 하며,
“제 성명은 정 흥태올시다. 얼마나 고생이 되십니까?”
하고 대단히 구변이 좋았다. 나는 그의 말의 발음으로 보아 그가 평안도 사람으로 서울말을 배운 사람인 줄을 알았다. 그러나 저녁에 인천 사는 간병부와 인사할 때에는 자기도 고향이 인천이라 하였고, 다음에 강원도 철원 사는 간병부와 인사를 할 때에는 자기 고향이 철원이라 하였고, 또 그 다음에 평양 사람 죄수가 들어와서 인사하게 된 때에는 자기 고향은 평양이라고 하였다. 그때에 곁에 있던 윤이 정을 흘겨보며,
“왜 또 해주도 고향이라고 아니했소? 대체 고향이 몇이나 되능기오?”
이렇게 오금을 박은 일이 있었다. 정은 한두 달 살아본 데면 그 지방 사람을 만날 때 다 고향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정은 우리 방에 오는 길로,
“이거 방이 더러워 쓰겠느냐?”
고 벗어붙이고 마룻바닥이며 식기며를 걸레질을 하고 또 자리밑을 떠들어보고는,
“이거 대체 소제라고는 안하고 사셨군? 이거 더러워 쓸 수가 있나?”
하고 방을 소제하기를 주장하였다.
“그 너머 혼자 깨끗한 체하지 마시오. 어디 그 수선에 정신 차리겠능기오?”
하고 윤은 돗자리 떨어내는 것을 반대하였다. 여기서부터 윤과 정의 의견 충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