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하고 한끝으로는 아깝고 한끝으로는 부끄럽고 또 한끝으로는 대견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이 인연도 장난도 꿈도 다 끝이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아쉽고 슬펐다. 도저히 이 대견한 인연을 일각이라도 더 늘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 하염없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아아, 그립고도 귀여운 내 달례.’하고 조신은 달례의 검은 머리쪽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말 없이 달례의 하소연을 듣고 있던 모례는 눈을 번쩍 뜨며, “달례, 잘 생각하셨소. 바로 생각하였소. 진실로 내 칼에 죽는 것이 소원이오? 마음에 아무 꺼리낌도 없고 말에 아무 거짓도 없소?”하고 달례를 향하여 물었다.
“천만에 말씀이셔라. 본래 믿지 못할 달례오나 세상을 떠나는 이몸의 마지막 하소연이오니 터럭끝만한 거짓도 없는 것을 고대로 믿어줍소사.”하는 달례의 음성에는 조금 떨림이 있었으나 분명하고도 힘이 있었다.
모례는 벌떡 일어나 한걸음 달례의 앞으로 다가서며, “진정 소원이 그러하거든, 일찍 세세 생생에 부부되기를 언약한 옛정을 생각하여, 이몸이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달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리다.”하고 왼편 손으로 금으로 아로새긴 칼집을 잡고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쥐기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번개가 번쩍하며 시퍼런 칼날이 공중에 걸려 있었다.
“달례, 눈을 들어 이 칼을 보오.”하고 모례는 칼을 한번 춤을 추이니 스르릉하고 칼이 울었다.
달례는 고개를 들어서 칼을 치어다보았다.
“칼을 보았소.”하고 달례는 다시 고개를 늘인다.
“칼이 무섭지 아니한가?”하는 모례의 말에 달례는, “무서울 줄이 있사오리까, 그 칼날이 한 찰나라도 빨리 내 살을 버히는 맛을 보고 싶어이다.”하고 그린 듯하였다.
“모례는 마지막으로 달례에게 수유를 주오. 이 세상에 대한 애착과 모든 인연을 다 끊고 마음이 가장 깨끗하고 고요해진 때에, 인제 죽어도 아무 부족함이 전연 없고 물과 같이 마음이 된 때에 손을 드시오. 그때에 내 칼이 떨어지리다.”
조신이나 달보고나 다 눈이 둥그레지고 칼보고, 거울보고는 달보고의 손을 부여잡고 죽은 듯이 있었다.
세 번이나 숨을 쉬었을까 하는 동안이 지나간 뒤에 달례는 가볍게 자기 바른손을 들었다.
번쩍하고 칼날이 빛날 때에는 조신도 달보고도 손으로 눈을 가리고 땅에 엎드려서 한참 아무 소리도 없었다.
조신은 무서운 광경을 예상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놀랐다. 달례의 머리쪽이 썽둥 잘라지고 뒷덜미에 한 치 길이만큼 실오라기만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모례의 칼은 벌써 칼집에 있었다.
조신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았다. 머리쪽을 자른 것은 승이 되란 말이요, 목에 살을 잠깐 베어서 피를 내인 것은 이것으로 죽이는 것을 대신한다는 뜻이었다. 그 어떻게 그렇게 모례의 검술이 용할까 하고 탄복하였다.
조신은 유쾌하다 할이만큼 가벼운 포승을 지고 잡혀가서 옥에 매인 사람이 되었다.
중생이 사는 곳에 죄가 있어서 나라이 있는 곳에 옥이 있었다. 왕궁을 지을 때에는 옥도 아니 짓지 못하였다. 극락이 있으면 지옥이 있었다. 이것은 모두 중생의 탐욕이 그리는 그림이었다.
옥은 어느 나라나 어느 고을이나 마찬가지로 어둡고 괴로운 곳이었다. 문은 검고 두껍고 담은 흉 없고 높고 창은 작고 겨울이면 춥고 여름이면 더워서 서늘하거나 따뜻함이 있을 수 없었다. 더할 수 없이 더러운 마음들이 이루는 세계이매, 그같이 더러웠다. 흙 바닥은 오줌과 똥과 피와 고름이 반죽이 되고 그 위에 때묻은 죄인들이 목에는 칼, 손에는 수갑, 발에는 고랑을 차고 미움과 원망과 슬픔과 절망의 숨을 쉬고 있다. 어둠침침한 속에 허여멀끔한 여인 얼굴과 멀뚱멀뚱한 눈들이 번쩍거렸다. 쿨룩쿨룩 기침소리와 꺾꺾 앓는 소리가 틀렸다. 이속에서 개벽 이래로 몇 천 몇만의 사람이 죽어나간 것이다. 조신은 이러한 옥속에 들어온 것이었다.
옥에서 주는 밥이 맛있고 배부를 리가 없어서 배는 늘 고팠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중에 가장 더럽고 괴로운 데가 옥인 모양으로, 사람이 먹는 것 중에 가장 맛없는 밥이 옥밥이었다. 배는 늘 고팠다. 목은 늘 말랐다. 늘 추웠다. 늘 아팠다. 늘 침침하고 늘 답답하였다.
그러나 조신은 이속에서 기쁨을 찾기로 결심하였다. 이 생활을 수도하는 고행을 삼으려는 갸륵한 결심을 하였다. 조신은 오래 잊어버렸던 중의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일심으로 진언을 외우고 염불을 하였다. 얻어들은 경 구절도 생각하고 참선도 하였다. 이런 것은 과연 큰 효과가 있어서 조신은 날마다 제 법력이 늘어감을 느꼈다. 그 증거로는 마음이 편안하였다. 다른 죄수들이 다 짜증을 내고 악담을 하고 한숨을 쉬어도 조신은 점점 더 태연할 수가 있었다.
날마다 죄수는 들고 났다. 어떤 죄수는 끌려나갔다가 몹시 얻어맞고 늘어져서 다시 피에 젖은 옷에서 비린내를 뿜으면서 들어오기도 하나, 어떤 죄수는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지 아니하여서 그 자리가 하루 이틀 비어 있는 일도 있었다. 이런 것은 무죄 백방이 되었거나, 죽은 것이라고 다른 죄수들이 생각하고는 그 자리를 다시금 돌아보는 것이다.
새로 들어오는 죄수는 살도 있고 기운도 있었다. 그는 먼저부터 있는 죄수들에게 여러 가지 세상 소식을 전하였다. 이것은 옥 중에서는 가장 큰 낙이었다.
이 속에 들어오는 사람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었다. 도적질하고 온 놈, 사람 때리고 온 놈, 또는 조신 모양으로 사람을 죽이고 온 놈 남의 집에 불 싸놓고 온 놈, 계집 때문에 잡힌 놈, 양반 욕보인 죄로 걸린 놈, 이 모양으로 가지 각색 죄명으로 온 놈들이었으나, 한가지 모든 놈에 공통한 것은 저는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을 죽였지마는, 그런 경우에는 아니 죽일 수 없었다든가, 불을 놓은 것은 사실이나 불 놓인 놈의 소행이 더 나쁘다든가, 이 모양이어서 아무도 제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신은 그런 핑계를 들을 때마다 제 죄도 생각해보았다.
‘달례 같은 어여쁜 계집이 와서 매달리니 어떻게 뿌리쳐? 누구는 그런 경우에 가만 둘까. 평목이 놈이 무리한 소리로 위협을 하니 어떻게 가만 두어? 누구는 그놈을 안 죽여버릴 테야?’ 이 모양으로 생각하면 조신은 아무 죄도 없는 것 같았다.
“아뿔사!”하고 조신은 흠칫하였다.
‘평목이 놈이 나 없는 틈에 내 딸에게 아니 내 아내에게 무례한 짓을 하려 했기 때문에 그놈을 죽였다고 했다면 고만 아냐? 분해, 분해!’ 조신은 제가 대답 잘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괜히 모두 불었다. 모례놈헌테 속았다.’ 이렇게 생각한 조신에게는 다시 마음의 평화는 없었다.
조신은 아직 판결은 아니 받고 있었다. 사실을 활활 다 자복하였건마는, 법의 판정에는 여러 가지 까다로운 절차가 많았다. 죄인이 자복을 하였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다 믿는 것은 법이 아니다. 평목의 시체를 관원이 검시도 하여야 하고 동네 사람들의 증언도 들어야 한다. 이러한 사정으로 이 사건은 해가 넘어서 조신은 옥에서 한 설을 쉬었다.
섣달 그믐날 밤 부중 여러 절에서는 딩 딩 묵은 해를 보내는 인경이 울었다. 장방에 조신과 같이 갇힌 수십 명 죄수들이 잠을 못 이루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것이 등잔불 빛에 번쩍번쩍하였다. 그들은 모두 집을 생각하고 처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벽 틈으로는 찬바람이 휘휘 들어오고 바깥에서는 아마 눈보라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쓰윽쓰윽하고 바다의 물결소리 모양으로 들렸다.
조신은 한 소리도 아니 놓치려는 듯이 인경소리를 세고 있었다. 마침내 잉잉 하는 울림을 남기고 인경소리도 그쳤다. 방 어느 구석에선가 훌쩍훌쩍 느껴우는 소리가 들렸다.
인경소리에 가라앉았던 조신의 마음에는 다시 번뇌의 물결이 출렁거리기를 시작하였다.
‘어, 추워!’하고 조신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한번 불끈 쥐었다.
‘죽기 싫어. 살고 싶어.’
꿈 - 21. 선택 그리고 번뇌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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