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은 잠깐 동안 말이 막혔다. 진정을 말하면 그래도 살고 싶었다. 그러나 또 한 번 거짓말을 하였다.

“이몸은 만번 죽어 마땅하오나 이몸이 죽으면 저것들을 뉘가 먹여살리오. 아손마마, 저것들을 불쌍히 보시와서 그저 이번만 살려주소서.”하고 조신은 소리를 내어서 느껴울었다. 그러나 조신은 제가 마치 저 죽는 것은 둘째요, 처자가 가여워서 슬퍼하는 모양을 꾸미는 것이 저를 속임인 줄 알면서도 아무쪼록 모례가(또 달례나 달보고도) 거기 속아주기를 바라는 범부의 심사가 부끄럽고도 슬펐다.

모례가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조신은 더욱 사정하고 조르고 싶었다. 처음에는 아주 뉘우치는 깨끗한 마음으로 말을 꺼내었으나 살고 싶은 생각, 요행을 바라는 탐심의 구름이 점점 조신의 마음을 흐리게 하였다. 조신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모례를 눈물로 이기고 싶었다.

“제발 이번만. 아손마마, 활인 공덕으로 제발 이번 한번만 살려줍소사. 이번만 살려주시면 다시는 죄를 안 짓고 착한 사람이 되겠사옵고, 또 세세 생생에 아손마마 복혜쌍전하소서 하고 축원하겠사오니 아손마마, 제발 이번만 살려줍소사.”하고 조신은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었다.

“조신 대사!”하고 모례는 아까보다도 높은 어조로 불렀다. 조신이 듣기에 그것은 무서운 어조요, 제 눈물에 속은 어조는 아니었다. 조신은 한줄기 살아날 희망도 끊어지는가 하고 낙심하면서 고개를 쳐들어 모례를 우러러보았다. 속으로는 모례의 마음을 돌려줍소서 하고 무수히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다.

“조신 대사, 나는 대사를 죽일 마음도 없고 살릴 힘도 없소. 대사가 내 아내 달례를 유혹하여가지고 달아난 뒤로 나는 여태껏 대사의 거처를 탐문하였었소. 대사를 찾기만 하면 이 칼로 죽여서 원수를 갚을 양으로. 그러다가 평목 대사가 대사의 숨은 곳을 알아내었다 하기로 진가를 알아볼 양으로 내가 평목 대사를 보냈던 것이요. 평목 대사를 먼저 보낼 때에는 내게 두 가지 생각이 있었소."

"만일 조신 대사가 죄를 뉘우치고 내게 와서 빌고 다시 중이 되어서 수도를 한다면 나는 영영 모른 체하고 말리라 하는 마음하고, 또 한 생각은 만일 조신 대사가 참회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칼로…”하고 허리에 찬 칼을 쭉 빼어서 조신을 겨누며, “만일 아직도 뉘우침이 없다면 내가 이칼로 조신 대사의 목을 버히려 하는 것이었소. 그랬더니 평목 대사가 떠난 뒤에 열흘이 되어도 스무 날이 되어도 한 달이 되어도 소식이 없으므로 내가 그 고을 원께 청하여 사냥을 나왔던 것이요."

"내가 대사의 집을 찾다가 우물가에서 저 아기를 만나서는 모든 의심이 다 풀리고 저 아기가 달례의 딸인 줄을 안 것이요. 내가 저 아기에게 옥고리를 준 것은 그것을 보면 혹시나 달례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보고 지난 잘못을 뉘우치는 눈물을 흘리고 내게 용서함을 청할까 한 것이요. 나는 살생을 원치는 아니하오. 더구나 한번 몸에 가사를 걸었던 비구의 몸에 피를 내기를 원치 아니하였소. 그래서 조신 대사에게 살 기회를 넉넉히 줄 겸, 또 정말 그집이 조신 대사와 달례가 사는 집인가를 확실히 알 겸 대사의 집에 사처를 정하였던 것이요."

"그러나 내가 바라던 것은 다 틀려버렸소. 조신 대사는 평목 대사를 죽였다는 것이 발각되었소구료. 복도 죄도 지은 데로 가는 것이야. 조신 대사는 불제자이면서도 죄를 짓고 복을 누리려 하였소. 꾀를 가지고 천하를 속이고 인과응보의 법을 속이려 하였지마는, 그게 될 일인가. 조신 대사는 굴에서 평목 대사의 시신이 나왔을 때에도 시치미를 떼었소. 대사는 그러하므로 천지의 법을 속여보려 하였고 또 벽장에 둔 바랑을 꺼내려고 구멍을 뚫었지마는, 그것이 도로 그 바랑을 세상에 내어놓게 재촉하였소. 그것이 안되니까, 대사는 도망하였소. 도망하여 세상과 천지를 속이려 하였지마는, 그 사슴이가 자취를 남기던 것과 같이 조신 대사도 자취를 남겼소. 그림자와 같이 따르는 업보를 어떻게 피한단 말요?"

"그런데 조신 대사는 제 죄의 자취를 지워버리고 제 업보의 그림자를 떼어버리려고 하였소. 그게 어리석다는 것이야. 탐욕이 중생의 눈을 가리운 거야, 그런데 조신 대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이제는 눈물과 말과 보챔으로 또한번 하늘과 땅을 속여보자는 거야. 부끄러운 일 아뇨? 황송한 일 아뇨? 이 자리에서는 조신 대사의 목숨은 내게 달렸소. 내 한번 손을 들면 대사의 목이 이 칼에 떨어지는 거야. 내가 십유여 년 두고 벼르던 원수를 쾌히 갚을 수 있는 이때요.”하고 모례는 벌떡 일어나 칼을 높이 들어 조신의 목을 겨눈다.

조신은 황황하여 몸을 일으켜 합장하고, “아손마마, 살려줍시오. 잠깐만 참아줍시오.”하고 애원하는 눈으로 모례를 우러러본다. 모례의 눈에서는 불길이 뿜었다.

모례는 소리를 높였다. 타오르는 분노를 더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당장에 그 손에 들린 칼이 조신의 목에 떨어질 것같이 흔들리고 번쩍거렸다.

“이놈! 네 조신아, 듣거라. 불도를 닦는다는 중으로서 남의 아내를 빼어내고도 잘못한 줄을 모르고, 네 법려인 사람을 죽이고도 아직도 좀꾀를 부려서 나를 속이고 천지신명을 속이려 하니, 너 같은 놈을 살려두면 우리나라가 더러워질 것이다. 내가 당장에 이칼로 네 목을 자를 것이로되, 아니하는 뜻은 너는 이미 나라의 죄인이라, 나라의 죄인을 내 손으로 죽이기 황송하여 참거니와, 만일 네가 도망하여 나라에서 너를 잡지 못하면 내가 하늘끝까지 가서라도 이칼로 네 목을 베이고야 말 터이니 그리 알어라.”하고 칼을 도로 집에 꽂고 자리에 앉는다.

조신은 고만 방바닥에 엎더지고 말았다. 머리를 부딪는 소리가 땅 하였다. 조신은 마치 벼락맞은 사람과 같았다. 힘줄에도 힘이 없고 뼈에서도 힘이 빠진 것 같았다. 오직 부끄러움과 절망의 답답함만이 가슴에 꽉 차서 숨이 막힐 듯하였다.

칼보고가 깨어서 울었다. 그 소리에 젖먹이도 깨어서 기겁을 할 듯이 울었다. 조신은 고개를 들어서 달례와 달보고를 바라보았다. 달례는 벽을 향한 대로 느껴울고 달보고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울고 있었다.

조신은 모례를 바라보았다. 모례는 깎아놓은 등신 모양으로 가만히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마귀가 가까운 어디서 까옥까옥하고 자꾸 짖고 있었다.

조신은 마침내 결심을 하였다. 인제는 별수 없다. 자기는 자현하여서 받을 죄를 받기로 하고 처자의 목숨을 모례에게 부탁하자는 것이었다. 그렇다, 사내답게 이렇게 하리라 하고 작정을 하니 마음이 가쁜하였다.

“아손마마!”하고 조신은 모례를 불렀다.

모례는 말없이 조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는 몹시 멸시하는 빛이 있었다.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고 입귀가 좌우로 처진 양이 참을 수 없이 못마땅하다는 뜻을 표함이었다. 이것은 지위 높은 귀인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조신은 모례의 표정을 보고 더욱 가슴이 섬뜨레하였으나 큰 결심을 한 조신에게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도 없고 꺼릴 것도 없었다. 만일 이제 또 모례가 칼을 빼어 목을 겨누더라도, 그날이 목덜미에 스치더라도 눈도 깜짝 아니할 것 같다. 아까운 것이 있을 때에는 바싹만 해도 겁이 많을러니 모든것을 다 버리고 나니, 하늘과 땅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조신은 처자도 이제는 제 것이 아니요. 제 몸도 목숨도 그러함을 느꼈다. 조신은 마치 무서운 꿈을 깨어난 가벼움으로 입을 열었다.

“모례 아손, 이제 내 마음은 작정되었소. 나는 이길로 가서 자현하려오. 나는 남의 아내를 유인하고 남의 목숨을 끊었으니, 내가 나라에서 받을 벌이 무엇인지를 아오. 나는 앙탈 아니하고 내게 오는 업보를 달게 받겠소. 내게 이런 마음이 나도록 - 나를 오래 떠났던 본심에 돌아가도록 이끌어준 아손의 자비 방편을 못내 고맙게 생각하오.”하고 조신은 잠깐 말을 끊고 모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례의 눈과 입에는 어느덧 경멸의 빛이 줄어졌다. 그것을 볼 때에 조신은 만족하고 또 새로운 힘을 얻었다.

조신은 그리고는 달례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약간 그들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이제는 도저히 내 것이 아니라고 제 마음을 꽉 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모례 아손, 이몸이 간 뒤에는 의지할 곳 없는 이것들을 부디 건져주소사. 굶어죽지 않도록, 죄인의 자식이라고 천대받지 않도록 부디 돌아보아주소사. 그 은혜는 세세 생생에 갚사오리다.”할 때에 조신은 얼음같이 식었던 몸이 훈훈하게 온기가 돎을 느꼈다. 그러고 두 눈에서는 따뜻한 눈물이 막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달례도 달보고도 모두 더욱 느껴워서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프지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슬픔이었다.
모례의 눈도 젖었다. 그가 가만히 눈을 감을 때에 두 줄 눈물이 옥같이 흰 뺨에 흘러내리는 것을 그는 씻으려고도 아니하였다.

방안은 고요하였다. 천지도 고요하였다. 한 중생이 바로 깨달아 보리심을 발할 때에는 삼천 대천 세계가 여섯 가지로 흔들리고 지옥의 불길도 일시는 쉬인다고 한다.

이렇게 고요한 동안에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모례는 이윽고 손을 들어 낯에 눈물을 씻고, “조신 대사, 잘 알았소. 그렇게 보살의 본심에 돌아오시니 고맙소. 길 잃으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보살이라, 과연 대사는 보살이시오. 나는 지금 대사의 말씀에서 눈물에서 부처님을 뵈왔소. 이 방안에 시방 삼세 제불 보살이 뫼와 겨오심을 뵈왔소. 대사의 가족은 염려마시오. 내가 다 생각한 바가 있소. 대강 말씀하리다. 아이들은 내가 내 집에 데려다가 내 아들 딸로 기르오리다. 그러고 아이들의 어머닐랑은 내 집에를 오든지, 친정으로 가든지, 또는 달리 원하는 데로 가든지 마음대로 하기로 하는 것이 어떠하오?”

모례의 관대함을 조신은 찬탄하여 일어나 절하고, “은혜 망극하오. 더 무슨 말씀을 이몸이 하오리까?”하고 달보고를 돌아보며, “달보고야, 이제부터는 이 어른이 네 참 아버지시다. 칼보고도 다 이제부터는 모례 아손을 아버지로 모시고 섬겨라. 나는 두텁고개 눈속에 묻힌 미력이를 따라 저세상으로 가련다.”할 때에는 그래도 목이 메었다. 조신의 눈앞에는 제 몸이 미력의 뒤를 따라 죽음의 어두운 길로 걸어가는 양이 보이고, 평목이가 혀를 빼어물고 어둠속에서 불쑥 나오는 양이 보여서 머리가 쭈뼛하였다. 무서워서 어떻게 죽나 하는 생각이 나자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이때에 달례가 벽을 향하고 그린 듯이 섰던 몸을 돌려서 오른 무릎을 꿇고 왼편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두 손을 단정히 놓고 앉아 잠깐 모례를 치떠 보고 고부슴하게 고개를 숙이며 옥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모례 아손마마, 죄 많은 이몸이 무슨 면목으로 마마를 대하며 무슨 염의로 말씀을 여쭈오리까. 다만 목을 늘여서 죽이시기를 바라는 일밖에 없사오나 당초에 이몸이 조신 대사를 유혹한 것이옵고 조신 대사가 이몸에 먼저 손을 대인 것은 아니오니 그것만은 알아줍소서. 우리나라 법에 남편 있는 계집이 딴 남진을 하는 것은 죽일 죄라 하옵고, 또 불의라 하여도 십유여 년 남편이라고 부르던 조신 대사가 이제 이몸 때문에 죽게 되었사온데, 이몸 혼자 세상에 살아 있을 염치도 없사옵고 또 아손마마께서 자비심을 베푸시와, 저 어린것들을 거두어주신다 하오시니 더우기 황감하올 뿐더러, 죽더라도 마음에 걸리는 일 하나도 없사오며, 또 평생에 남편으로 섬기기를 언약하고도 배반한 이 죄인이 마지막 길을 떠날 때에 아손마마의 칼에 이 죄 많은 몸을 벗어나면 저생에서 받는 죄도 가벼울 것 같사오니, 제발 아손의 허리에 차신 칼로 이목을 베여줍소사.”하고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가만히 몸을 앞으로 굽히며 옥과 같이 흰 목을 모례의 앞에 늘인다.

조신은 달례의 그 말, 그 태도에 감복하였다.

‘달례는 도저히 나 같은 범부의 짝은 아니다. 저 사람이 나와 같이 십여 년을 동거한 것은 무슨 이상한 인연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장난이다.’